제 9 장. 하나님 아버지

1. 논증이 아닌 계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으로 증거하시려고 하시지 않았다. 복음서의 서두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증거]나 [증명]이란 글자를 찾아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명이라고 하는 일종의 논증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관계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다. 그 방법으로 약간의 난점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증명 그 자체가 환상을 가지게는 못한다. 파사의 시인 오말 카이얌(Omar Khayyam)의 시를 읽어보자.

어린 시절 나는 열심히 박사와 성자에게 대하여 몹시도 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답을 못얻고 이론의 그 문으로 도루 나왔네

옛날에는 이론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으나 이제 그런 방법은 쓰지 않는다. 또 앞으로도 그런 식의 이론 전개로서는 하나님을 이해도 못할 뿐더러 확신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확신은 두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논증과 이론보다는 더 깊고 높은 차원의 것이다. 즉 우리 영혼에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제시로 비롯된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제시에 대한 우리 영혼의 응답 곧 신앙이다.

종교적이며 심리학적인 거룩한 글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논증을 총괄하자]든지,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등의 서두로서 시작한 글은 하나도 없다.

이런 복잡한 이론으로 전개하지 않고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로서 갑자기 들리는 북소리처럼 약간 갑작스런 인상을 주는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논증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논증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러 오셨다.

예수에게는 논증이 필요없다. 그의 말씀은 직접 듣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신앙의 결단이 있으리라고는 그는 단언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정확한 견해였다. 예수님과듣는 우리들은 함께 유대인이었으며 유대인의 중심종교는 논리를 초월한 일신교였다. 그 일신교의 본질은 이러하였다.[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이미 싹터 있었으며 예수님 자신이 보기에도 이 사실은 명백하였다. 이 사상은 예수님과 그의 말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신념이었다. 이 하나님 사상을 기초로하여 예수님은 일을 하셨다. 고로 [하나님이 계시냐?] 하는 따위의 질문은 있을 수 없었으며 다만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항상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복음서의 짧은 기사에 [아버지]란 말이 약 150회 이상 기록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입을 열었을 때[아버지]란 말을 사용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이까?] (눅 2:49).따라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아버지]란 말을 사용하셨다. 복음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아버지]라는 말을 하나님을 부르는 최초의 존칭으로 고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2. 그리스도의 교훈의 독창적 요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기원은 시작은 예수님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도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사상을 가졌으며, 또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구약 사상을 예수님은 더욱 철저하게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구약에 전래해오는 아버지 사상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부성을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 [여호와의 마음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이는 하나님이 그 민족의 아버지란 뜻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은 점점 더 깊게,또한 더 인격적으로,특히 시편의 한 대목에는 [고아의 아버지](시68:5)라고 부른 곳이 있다. 또한 그의 자비로움에 대하여도 이렇게 말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시103:14). 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말은 예수 이전부터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사용하심에 있어서 예수님이 생각하기는 새롭고 독특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두 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그네처럼 지나가 버리던 이 사상을 이제는 아주 생의 중심으로 고정시키는데 주력하셨다. 예수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창조주와 피조물,주관자와 복종자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상을 별로 강조하시지 않고 가족적인 관계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표시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자관계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부자관계, 하나님의 부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옛날 구약시대 선배들이 말한 것보다 더 철저하게 참뜻을 밝혀주었다. 그뿐 아니라 일종의 혁명적인 사상으로서 이 [아버지]개념이 종교의 전모를 변화시켰다.

둘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에는 새로운 길이와 내용이있으므로 이 말씀을 전혀 예수님의 독창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이 말을 다만 현실사건의 중심으로만 치지 아니하고 인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리만큼 그 내용을 풍부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도 그러하려니와 그는 하나님 말씀 이상의 행동은 하시지 않았다. 자신의 말씀 내용인 곧 자신의 생활이었다.

역사상 예수 혼자만이 거룩하신 父性의 산 뜻을 보여주는 생활을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개선적으로 꾸려나갔다. 그리스도의 이 절대적인 효도와 순종 생활, 그리고 신자성에 아버지 하나님의 자애, 강력한 힘, 명랑성,끊임없는 신뢰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아버지]란 말에는 전대미문의 깊이가 포함되어 있다.

3. 부성의 의미

이제 우리는 이 문제의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뜻하신 바 실제적인 결과는 무엇일까? 여기서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복음서의 여러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예수의 부성에 대한 사상이 포함된 뜻을 살피기로 하자. 그러나 이 주제의 실제적 교훈은 복음서의 설명에 근거하여 찾는 것이 가장 좋다. 복음서만이 그리스도의 의도를 가장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자녀되는 인간의 모든 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신앙을 요구하실 때 [만일]이라든지, [그러나],또는 어떤 조건을 제시한 다음에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그리고 절대적으로 믿으라고 강조하셨다. 의식주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니 염려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기 맡은 일에 종사하고 착실하게 직무를 수행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일에 함께 하신다. 그 일 배후에 계셔서 그 사람을 충심으로 사랑하시며 염려해 주시고 그를 위하여 계획하시고 기억하시고 상상외로 언제든지 선한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이런 상황을 예수님으니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다.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교훈하신 바를 실제 생활에 실천하셨다. 그의 설교는 곧 그의 생활이었다. 복음서의 기록 하나 하나는 그가 사람에게 알리고 또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정신으로 뚜렷하게 보여 주심으로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고 섬기는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 한 예로 마가복음 4장의 기록을 들수 있다.

어느날 밤, 갈릴리 호수는 갑자기 밀어닥친 광풍으로 예수와 그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순식간에 물속에 침물될 위기에 있었다. 바다에 익숙한 고기잡이들이었나. 어떻게 바람이 거센지 도저히 키를 잡을 길이 없고 다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최후만을 기다리는 초조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다. 오늘 우리가 이 기사를 읽을 때, 풍랑 중에 예수께서 고기잡이 배 위에서 주무셨다는 사실은 만인이 놀랄 신앙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바다가 하나님의 바다요, 물결과 바람과 그 어둠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장중에 바다요, 물결과 바람과그 어둠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장중에 있어 모든 것이 아버지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녀인 우리의 생활에 언제든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지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마련하신다. 인간은 다만 그 안에서 평화와 안일의 생을 항상 누릴 수 있음을 그의 교훈과 그의 생활이 우리에게 여실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처럼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공포와 염려를 물리칠 수 있으며 영광스러운 자유와 하늘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의뢰함으로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야 참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마5:3). 그는 신약에서 말하는 [세상을 이긴다]는 사실을 친히 체험하게 된다 그가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친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십령하나 하나를 아시고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그 자녀에 대한 사랑은 평면적 사랑이 아니다. 자녀 하나의 사정을 살펴 베푸시는 특수한 사랑,곧 입체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모드 헤아리고 계신다(마10:30).[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요3:16)함은 그의 사랑의 한 면이며,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나니라](눅 15:10) 하심도 또 다른 면이다. 참목자는 아혼 아홉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한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눅 15:4-7).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은 그의 행동으로써 개인의 심령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실상 개인 각자의 영혼이 인격적으로 그에게 뜨거운 애정이 그를 향하는 것이며 결코 집단적인 열성이란 있을 수 없다. 벳세다못가에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으나 가장 불쌍한 병자,38년 동안 신음하면서 절망에 잠기게 한 영혼을 돌아보셨다(요5:2). 나인성문을 지나실 때, 그는 특별히 외아들을 잃고 울고 가는 한 여인의 정경을 불쌍히 여겨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셨다(눅7:11).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이 혼잡한 중에서도 그는 다만 한번만이라도 만져주기를 애원하는 여인의 떨고 섰는 심령을 불쌍히 여겨 그의 혈루증을 고쳐주셨다(막 5:25).복음서 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화는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눈자애 넘치는 말씀이다(요4:7).그는 또 어느날 밤,니고데모의 어두운 심령에 한걸음 두걸음 가까이 나아가셨다(요3:1).그는 여리고의 환영군중 가운데서 삭개오라는 세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셨다(눅19:1).예수를 바라보면 어거스틴의 고백이 생각난다. [그는 우리 중에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다는 듯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남달리 사랑합니다.]

(3)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섬김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라는 가족적인 개념은 종교의 딱딱한 형식적인 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오로지 화려한 의식만을 만족하게 여기시는줄로 생각한다(마5:523:23). 그러나 그것은 세상 육신의 아버지로 아들에게 요구하는 방법이 아닌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주실리가 없다. 그렇다고 불경스러워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자유로운 마음, 눌리고 강제 당하는 매인 마음이 아니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그에게 나갈 수 있는 그 심정이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의 의식을 모두 거절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그는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마27:51).의식적인 명문 구성이 아니라도 애원하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일정한 기도 형식을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장려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시고 너희가 그 자녀일진대 너희는 무슨 요구든지 그의 앞에 제출할 자격이 있다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7:7이하에 가르치셨다. 만일 하나님께 어떤 일 아뢰기를 꺼린다면 그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바른관계가 유산된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자연스러움을 나타낼 수 있다. 아버지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면 그는 그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예수는 우리의 종교에 새로운 자유와 어린아이의 직접성과 단순성을 가르쳐 주셨다.

(4)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받는 고통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옛날에는 (구약을 예로 본다면)사람들은 저들이 받는 고통, 시험,비애 등, 모든 종류의 인간고를 하나님의 진노에서온 형벌,저들의 죄를 책하시는 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죄와 실수로 말미암아 실상은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고가 그런 정도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 전율할만큼 끔찍한 생각을 물리치셨다.그는 인간고의 문제를 율법적인 인과보응의 사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고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고통을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어떤 영혼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랑의 한 특수 방법으로 고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고통을 겪게 하여 그 영혼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이다(이 고통의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자).

고통을 이렇게 해석하거나 가르치시기에만 그치지 않으시고 그 자신이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그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셨다](롬 8:32).왜 그는 아끼지 아니하셨는가? 그것은 예수의 고통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영광스러운 목적 때문에 예수님은 골고다로 향한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하나님은 그 독생자도 이렇게 대우하셨는데 우리들인들 예외가 되겠는가? 우리의 인간고도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나를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수단임을 알아야 한다.[나를 인하여 너희가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마5:11).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7).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고통 문제 해결에 있어서 또 하나 다른 면이 있음을 우리는 배운다. 즉 우리가 받는 그 고통에 하나님께서도 동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일진대 이 세상에서 받는 어떤 모양의 고통이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며 너를 해치는 그 무엇은 또한 하나님을 해치는 것이며(그는 참아버지이기 때문에),또 우리가 겪어야 할 어떤 시련의 뜨거운 가마 속에도 그 뜨거움이 비록 일곱배가 더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풀무에 같이 하신다(단3:25).[그들의 환난에 동참하신다](사63:9). 하나님이 인간고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의 최고 실례는 갈보리 십자가이다. 저들이 세운 푸른 언덕 위 십자가를 볼때, 실상 비참한 고통을 겪으신 하나님의 십자가가 하늘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심중에 있었음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5)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죄와 용서는 새로운 빛 아래 놓여진다. 한편으로 죄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우주 배후의 힘이 어떤 비인격 법칙민이라면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은 그 법칙을 가지고 위반하는 조가 될 것이며,만일 우주 배후의 힘이 예수님께서 계시하신대로[아버지]라고 하면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행동은 그의 사랑을 배반하는 죄가 된다. 불변의 냉엄한 법칙을 깨뜨림이 죄라면 사람을 반역하여 깨뜨림은 더 큰 죄가 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자기 죄를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나의 죄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록은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모른다 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법칙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죽음을 당하심만이 아니다.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느끼신다. 정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니 죄의 뜻은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견딜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참으시고 죄를 죄대로 갚지 않으신 것이 곧 용서다. 하나님도 용서하실 수 있을까? 사람들은 예수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고, 또 거기에 대한 대답이란 항상 시원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님의 가르치신대로 부르게 되자 [하나님이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로 문제는 바뀌어졌다.

탕자의 아버지는 타락한 아들이 돌아올 때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 아들이 찾아와 머리를 숙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맨발로 뛰어나가 그 남루한 옷을 입은 걸인생활로 더러워진 때묻은 그의 몸을 곧 껴안았다. 용서하실까?않으실까를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이 허둥지둥 찾아온 그 아들을 곧 맞아주는 이것이 용서이다.

(6)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같이 한 형제라고 예수님은 가르친다.

예수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말을 사용한바 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형제사상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형제애를 부르짖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이 점을 등한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이 신앙이 없이는 형제애를 바르게 주장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에다 하나님의 부성을 심어 주심은 그것으로서 형제애를 법칙으로 세우시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부르짖을 수 있는 동기와 힘을 주시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도 나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그도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적대감정을 버릴 수 있다. [동양인은 동양인이고,서양인은 서양인이다]라는 식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세계에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모든 사람의 차별이 없어지고 우월감이 소멸되는 길,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데에만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만 교회주의란 것이 없어지고 영적 음악을 망치는 모든 부조리가 없어지고, 민족과 민족의 차별이 없어지고, 국제 연합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고상한 이상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거기에서만 달성될 수 있다.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해 주신 이 예수의 교훈을 받아 이 땅의 조호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다. 비로소 하늘로부터 오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이 그 신부 되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부에게 실현될 것이다.

매일 성경


 이사야 63:9-16    선지자의 비견
 마태복음 11:25-30 아버지와 아들
 마가복음 4:35-41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신앙
 마태복음 7:7-11   주께서 주시리라
 누가복음 15:11-24 잃어버린 자에 대한 아버지와 사랑
 마태복음 23:1-12  하나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성
 마태복음 6:9-15   가정기

 

토론을 위한 문제

1.하나님의 부성을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예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하나님의 부성과 무죄한 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3.신약성경은 사람들이 "입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다른가?

4.우리의 사회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의 도전을 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