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병자를 고치심

1. 선한 의사

이 문제를 다루는 데는 두 면이 있다. 복음서에 말한 예수님의 치료 기사 하나를 택하여 그 방법과 그 뜻을 찾아보는 한 면과 또는 복음서 전체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 치유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2의 것을 택하시고 하자.

첫째,예수의 치료 사업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의 완전한 한 요소를 차지한다. 결코 치료 사업은 그의 교훈과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치료의 기적은 다만 일시적인 동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영혼의 문제와 꼭 같이 그들의 육체의 모든 문제에 해결을 주며,그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저 하신 자기 사명을 강력히 추진시킨 한 결실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구주로서 이러한 일을 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영혼과 육체의 문제는 어느 면으로서든지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함께 행동하고 서로 영향을 끼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료 사업은 하나님에게서 받으신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계셨다. 그가 제자들을 파송하여 어떤 사명은 사명으로 알고 계셨다. 그가 제자들을 파송하여 어떤 사명은 감당하도록 분부하실 때의 형편을 다만 그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일과 병고치는 일 두가지를 특히 하고 오라고 했다(막 3:15,눅10:9)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에서 그가 병고치신 이야기를 제해버리고 나면, 그는 다만 한 인망 있는 선생이요 귀찮으리만치 설교만하는 설교자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이 치료의 사건들을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신비한 힘 즉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신다는 기적의 사실을 강력히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이 모든 치료의 기사가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한 부딪치는 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치료의 사업은 정말 깊고 높은 거룩한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다만 가르치기나 잘하는 한 스승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초자연성을 아시는 길.그것은 그의 치료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고 이것을 만일 모르고 지내거나 여기에 무관심 한다면 그리스도의 중요한 일면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힘있는 일들은 이 치료의 사업이었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매우 소중히 다루었다.

2. 그리스도의 동정

예수님의 치료 사업은 흔들리지 않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우리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곧 그 해석이다. 왜? 또 어떻게 이일을 행하셨나 생각하자. 그 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 방면의 고찰이 가능하다. 즉 그 일을 하신 동기와 그 방법이다. 예수님은 왜 이 치료 사업을 중요시 하셨을까? 또 그의 고치심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동기의 문제

이 문제는 간단히 대답할 수도 있다. 즉 이 일을 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을 주목케 하려는 신중한 목적에서와 그의 신성을 증명하고 그러하므로 그의 교훈을 좀 더 확실히 깨닫게 하시려 하심에 의의가 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자기에게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즉 이 극적인 모든 사건을 그가 자기 사업 성취에 필요 조건으로 삼으셨다. 그의 지상 사업을 이 세계에 알리는 나팔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는 그의 당당한 권위, 혹은 권리의 표시인 신임장을 세상에 제시하시는 행위다. 즉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사실적 증거였다. 그 동기는 자기자신을 신임할 수 있게 하는데 있고 이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일으키고자 함에 있다.이 동기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자. 한가지 이상한 일은 이 일이 복음의 증거 자체와 모순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목하게 하고 그의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리고저 하여 그 능력의 일을 했다고 했다. 복음서가 참으로 그렇게 말했는가?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보다도 자기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고 남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경우에도 그의 몸을 숨기셨다고 했다. 복음서에 보면 그는 자기의 치료의 이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시려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8:4,막 8:26,눅 8:56).자기선전의 행동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대체 왜 예수님은 자기의 하신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며 그 신기한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여 큰 인망을 얻으려 하지 않았는가?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사람을 놀라게 함으로써 세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단번에 거절하셨다. 그것이 바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는 진실로 놀라게 할 수 있는 기적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하지 않고 다만 거룩함과 불타는 사랑으로만 걸으셨다. 그러므로 병자들의 병을 고치심에는 그 치료의 이적으로서 자기를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병자와 함께 아파 하시는 바로 그 사랑이 그 동기였다. 이것을 좀더 설명하면 그가 자기의 신적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행함에 있어서 그 능력을 자기 몸에 친히 나타나게 할 수도 있었으나 복음서는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그 능력으로서 은혜를 받도록 한 사실을 기록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기도 했다. 처음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 능력을 받아가지고 어느 정도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동기는 그의 인망을 높이고저 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런 동기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기적은 신앙을 일으킬 수 없다.[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그런 방법이 신앙을 일으킬 수 없음을 예수님은 철저히 알고 계셨다. 이것이 사실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신자의 부활 신앙은 결코 예수님의 신비와 놀라움으로 일어남이 아니다. 기적과 논쟁하는 그런 종류의 것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기는 그의 기적 때문이 아니다. 실상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순수하게 믿는 사람이라야 또한 그 기적도 믿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망을 얻기 위하여 기적을 행했다거나 우리가 결코 그 요술에 미혹되어 그를 믿게되지는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권위있는 행동은 다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보다 깊은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서에는 두 가지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상처에 대한 자비심이다. 문둥이가 고름나는 손등에 그의 손을 얹으심은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어린이를 그의 품안에 안으심도 군중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신비스런 인상과 감동을 일으키려고만 했다면 정말 그것은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다만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를 자기 품에 안으셨을 뿐이다. 문둥이의 몸에 손을 얹으심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였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행위의 가장 큰 동기는 언제 어디서든지 다만 그의 자비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었다.

그것은 결코 사람들이 할 수 잇는 값 싼 동정은 아니었다.[동정]이란 라틴어의 뜻은 [함께 괴로워 한다]는 말이다. 문둥이의 괴로움을 자기의 고민으로 삼으시고 함께 괴로워하는 그 마음이 주로 주님의 동정이었다. 땅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의 상처를 자기의 상처로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며 그들의 비애를 자기의 비애로 삼음이 예수님의 동정심의 근본이었다. 로마교에서는 [예수님의 다섯개의 상처]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네 곳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말한다. 그러나 상처는 다섯개만이 아니다. 수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일허게 인용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마 8:17,사53:4).실상 남을 위하는 동정심은 언제든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권세있는 일을 행하신 다른 동기는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는 병이란 용납될 수 없는 존재이다. 병이란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그 의지가 병을 당초부터 용납하실 리가 없다. 신을 쫓아내는 병은 하나님의 세계를 어지럽히는 난군이며 이단자다. 하나님의 세계와는 양립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를 쳐부수고저 했다. 병고치는 이적의 해석에 있어서 이적은 오늘날까지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예가님에게는 단념적 순응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결코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고칠 수 없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괴롭히시니까요] 같은 말은 할 수 없다. 예수님은 문둥이를 만났을 때 운명에 내어 맡기는 단념을 하지 않았다. 어린이의 울음을 못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흑암속에서 예수님은 결코 그저 복종을 권함으로써 만능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런 흑암과 싸우시는 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하늘에 깊은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아 오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이 모든 해악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어디까지라도 그것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예수님은 자기의 사업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업을 방해하는 사람의 왕국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이 치료 방법을 시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다만 사귀병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병도 다 사탄의 장난으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악령의 사자로 인하여 모든 흉악한 일이 발생한다는 생각했다.그러므로 어느 곳에서든지 고침을 받는 것은 그 병을 일으킨 악령 하나가 쫓김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 말미암아 모든 병자가 나음을 받게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곧 악령과 흑암과 사탄 왕국의 그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고 선과 빛과 하나님의 왕국이 새로이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나니라](눅 11:20). 그리고 그가 보낸 70제자들이 신비한 치료 사업을 하고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할 때 예수님도 기뻐하여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그가 가까왔나니라]한 그의 교훈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이 왜 병을 고치셨는가 하는 점은 위에서 고찰했다 우리는 이제[왜]에서 [어떻게]즉 그 치료 방법을 생각하자.그는 과연 병을 어떻게 고치셨는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의 무죄성과 도덕적 완전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모든 일은 결코 그것이 마술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일은 모두 한 도덕적인 성과에서 된 것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법칙을 그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하는 점에서 생각하기 쉽다. 죄악 세력을 공경하는 노예성과 불가피의 제한성을 가진 우리 같은 인간에게는 법칙이란 보장할 수 없는 한낱 향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와 같지 않고 초월한 분이라면 제한된 노에성과 제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절대적인 결저으로 깨끗하고 무죄하신 이가 어느날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분이 나타난 세게는 분명히 한 새로운 미지수에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 추측할 수 없이 깨긋하신 그 이는 역시 그 능력에 있어서도 측량할 수 없는 위력을 나타낼 것이 아닌가?

나의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는 열사람의 능력을 가졌다.

그 분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인격의 힘이 그의 도덕적 순결에 직접적으로 정비례 한다고 하면 절대적인 순결은 다른 인격을 구원하는 절대적인 능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런 순결하신 이를 상상으로 원했지만 사실 우리 역사상에 그런 분이 나타났다. 즉 나사렛 예수는 미증유의 능력의사실을 그의 순결로서 보여 주었다. 그가 위대한 능력을 나타냈다고 하여 별로 놀랄 것은 없다. 오히려 그가 그런 능력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놀랄만하다. 그 모든 능력의 사실은 모두 그의 인격의 정상적인 표현이며 그의 도덕적,독보적 탁월성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 능력의 가장 높은 예는 그의 부활이다. 예수를 친히 접하여 그 인격의 내용을 숙지한 초대 교우들은 부활 같은 초자연적 사건이 문제가 안될 정도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즉 그들은 그가 도덕적 완전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죽음 같은 것도 그에게 순복하고야 말 것을 알았다(이점에 대하여는 행2:42를 보라).전무후무의 죄 없는 인격 예수님이 그 위대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야 한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만 있다면 그가 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

병고치는 그의 이적은 그의 무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그의 무죄성은 하나님을 믿던 그의 신앙으로 말미암음이었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만화산 아래서 사귀 들린 한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아이를 고쳐서 돌려 보내신 후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은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마17:20)했다.

예수님은 아이를 고쳤지만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참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고 있었다. 그 확신의 문이 활짝 열리자 하나님의 능력은 쏟아진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예수님의 생애는 이 말씀대로 살아가신 결과를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 있는 일은 곧 그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는 아들의 신앙에 대한 그 아버지의 응답이다. 그러나 그의 무죄성과 그의 신앙만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대한 사람의 신앙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이 병자 고치시기를 주저하실 때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떤 어두운 그림자가 질때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앓는 사람은 여전히 앓고,불구자는 여전히 불구자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그것은 병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부터 아무 것도 받고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동네는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의 혜택을 입어보지 못한 곳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이런 불신의 나사렛 동네에서는 아무 일을 하시지 않았다고 복음서 기자는 말한다(마 13:58).

어떤 병자를 고치시기 전에 그는 먼저 말씀으로서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쳐 그들의 신앙에 불을 붙여 주셨다. 병자들의 상처를 만지고 그 불구된 곳을 만지심도(막 7:32) 그들로 하여금 먼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일으키고저 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 자신에게서 예수님을 믿는 마음이 생기게 될 때 그들은 고침을 받는다.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가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신앙을 보여 주는 일이다(막10:46)우리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신앙을 주시옵소서]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치료의 능력을 말함에 있어서 한가지 더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무엇이든지 그를 막아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그 능력으로 되어졌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것을 나타냄이다. 이 성령 활동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도 그와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위대한 성구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라](요3:34)한 말이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능력을 받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줄곧 은혜를 베푸히던 예수님의 사실은 우리의 한정된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한정의 능력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이 땅위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인간의 비극을 처리해 주시는 것 즉 은총의 활동이 나타난다.

이 땅위에는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 이외의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곤궁과 비극은 우리를 실망케하고 넘어지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생명은 우리에게 승리를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


 마태복음 8:10-17  자비의 전형적 행위
 마가복음 1:23-28  귀신들의 쫓겨남
 마가복음 1:40-45  문둥이가 고침 받음
 마가복음 10:46-52 소경 바디매오
 요한복음 11:35-45 나사로의 소생
 마태복음 17:14-21 믿음의 필연성
 누가복음 11:14-23 악한 나라의 패배

 

토론을 위한 문제

1.예수의 병고치신 동기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2.예수는 자기 교회로 하여금 병 고침 사역을 계속하게 하셨는가?

3.병고침 과정에서 믿음의 기능은 어떠한가?

4."기적"(혹은 이적)이란 말을 어떤 뜻으로 이해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