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위대한 신앙고백

1. 전환점

가이사랴 빌립보의 사건은 복음서에 있어 그 분수령을 이룬다. 여기에서부터 그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그를 왕좌에 앉히기라도 할 것 같았던 대중적인 인기는 사라지고 이제 조류는 시자가를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둘러싸고 있던 밝은 햇살을 사라져 어두워지고 대가는 찌는 듯이 더웠으며, 다가오는 폭풍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갈채를 보내던 목소리들이 약해져가고 더욱 불길한 어조가 들려왔다.예수께서는 가이사랴에서 말하자면 분기점에 서 계셨다. 그것은 마치 뒤로는 그가 지나왔던 모든 길이 돌아다 보이며, 앞으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더웁고 험악한 길이 보이는 언덕 마루와 같았다. 예수님은 행복했던 때의 잔조가 아직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 일별하신 후 돌아서서 어두운 그늘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제 그의 길은 갈보리 쪽으로 향해졌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 기슭 근처 요단강의 근원이 시작되는 먼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멀고 한적한 지방에서 제자들하고만 계셨을 때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들에게 그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질문을 단도직입적으로 던지셨다.[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13 이하,막 8:27 이하 눅 9:18이하).

2. 메시야 신분의 유보

제자들이나 그밖의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위와 인격에 대해 어떤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든지 간에 예수님 자신의 마음속에는 그의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하한 의심의 그림자도 지나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더욱 깊이 들어가서는 그 혼자만이 독특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이 지식은 그의 세가지 시험 사건 배후에 있었떤 지식이었다. 이 사실을 떠나서는 광야에서 있었던 사건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확실히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 지식이 그에게 있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 신분과 하나님 아들이라는 의식이 최초로 예수님의 영혼에 떠올랐던 것은 그가 세례를 받으실 때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나사렛에서의 전 침묵기간을 통해 점차로 형성되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사건은 그 자신의 본성과 직문에 대한 갑작스런 깨달음이 아니라 위로부터 권능을 받은 것과 오랫동안 점차로 발견해 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기간중 그가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되신 사실을 알지 못했던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이사랴에서 이 일이 있기까지는 그 지식이 대부분 가리워 숨겨져 있었다. 어떤 의미의 유보와 은폐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 사실을 지붕 위에 올라가서 외치지는 않으셨다. 그가 고쳐주신 병자들에게 그는 병 나은 사실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다(마8:49:30 막 5:43).예수님의 권능을 감지하고 그 신분을 추측한 후 이를 큰 소리로 외쳐 말했던 악령들에게 예수님은 잠잠할 것을 명하셨다(막1;24-25).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질문을 피하시고 그가 하시는 일들을 가리켜 보이셨다.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즉 요한에게는 충분히 사실을 드러내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 대답을 덧붙여 말씀하셨다(마11:2 이하). 예수니믄 같은 목적으로 수수께끼와 같은 [인자]라는 말을 일부러 택하여 즐겨 사용하셨다. 이 칭호는 영적인 심령에게는, 그리고 그들에게만 예수님의 메시야적 품격에 대한 암시를 주는 연상들(특히 다니엘 7:13)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연상들이 전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다만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사건이 있었던 그날이 사실이 완전히 드러나 있었던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경계하사 지기가 그리스도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마16:20).혹자는 이것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낮추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가리우셨도다 인간의 모습으로 땅위에 거하시나니 그의 위엄이 숨겨졌도다 라고 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메시야 신분을 유보하셨는가?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 의심으로 번민하셨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가 방금 살펴 본 바대로 이러한 답변은 고려대상에서 제외된다. 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수백년동안 꿈꾸어오던 메시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메시야와는 매우 달랐다. 메시야에 대한 대중적 기대에는 정치적 요소와 민족주의적 요소가 가득했다. 그 미세야는 오셔서 그의 나라를 티끌에서부터 일으키실 것이었다. 그는 힘으로 다윗의 위를 회복하실 것이었다. 그는 철장으로 이방을 부숴뜨릴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희망으로 타올랐으며,이제 필요한 것은 싯뻘건 잿불을 부채질하여 타오르게 할 [내가 메시야다'라고 하는 사람의 출현 뿐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났을 때는 이와 같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만일 처음부터 그의 신분은 내세우는 길을 택했더면 틀림없이 다시 한번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백성들이 와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그들의 민족적인 바램과 현세적인 욕망을 따라 왕으로 삼으려는 위험(요6:15)이 결코 멀리 있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공공연히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영화시켜야만 했다. 예수님은 수세기동안 부착되어 온 정치적 첨가물들을 제거 하셔야만 했다. 특히 예수님은 메시야 사상 속에 수난이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셔야만 했다. 메시야의 수난 사상은 예수님 시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전혀 낯선 것이었다. 이것이 메시야 신분 유보의 첫번째 이유였다. 예수께서는 첫번째 목표가 사람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을 알았다.이것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메시야 신분의 선포가 오해만을 낳게되며 전혀 예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열렬한 현세적 희망,따라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희망만을 자극할 뿐이라는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침묵하신 두번째 이유는 [그 이유는 그의 메시야 신분보다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 아들이신 신분과 관계된]가장 위대한 진리들은 말과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생활과 사랑으로만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느날 예수께서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 동족의 한 무리가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궁금증을 토로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들이 그런 식으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여러분은 명예나 아름다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백히 말할 수" 있겠는가?여러분은 저녁 놀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교향복의 아름다움과 신비의 마력을 간결한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참으로 위대한 감동적인 체험이나 발견들 중에 말로써 명백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인간의 마음속에 확신을 낳게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러나 바람소리가 들리는 곳에 바람이 불듯이 예수님과 함께 살며 그르 띵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본성과 아울러 그를 누구라고 불러야 할것인지 배워 알게 마련이다.

3. 가장 중대한 질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 일이 있었던 날,군중들을 멀리 뒤에 두고 열두 제자와만 함께 계셨을 때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유보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느끼셨다. 매우 갑작스럽게 그는 제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삶의 얼마큼 깊이 실제적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는 [토마스 칼라일]의 유명한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어느날,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온 집안이 침울하고 [칼라일]자신의 마음 역시 괴로웠을 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을 읽어주었다(요14:1이하).그러자 [칼라일]이 갑자기 외쳤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신 역시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 범인보다 무얼 더 잘 알 수 있겠습니까?] 그때까지 [칼라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신]성품에 관한 질문인 [가이사랴]에서의 질문을 애매하고 먼,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갑자기 삶의 무거운 압력에 눌리게 되자 그는 그 질문이야 말로 온 세상보다 더 중대한 것임을, 즉 그에게 있어서는 희망, 마음의 평화, 위안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권리에 관한 이 질문과 밀착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가장 중대한 질문이다.

복음서들은 왜 예수께서 이 특별한 시기를 택하셔서 질문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닥아 올 일을 말해주어야 한 은밀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시험하고 연단하시려 했는데 그 일이 더 이상 지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치욕적인 죽음이 그에게 신속히 닥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마16:21,막8:1,눅9:22). 이 사실을 말해주면 제자들의 충성 역시 끝나게 되지나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제자들 역시 그에게 등을 돌려버리게 되고 그의 수고가 헛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예수께서는 당연히 가질만 했다.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에 달려 있었다. 만일 그들의 신앙이 약했다면, 아직까지 머뭇거리며, 희미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 했던 내용이 주는 충격은 틀림없이 그들의 약한 믿음을 끝장 내버렸을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도 그 순간은 제자들에게 못지 않게 갈림길이 되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일반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어쨌든 대답하기에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처에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각 자기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여러 의견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벼라별 소문과 의견이 떠돌고 있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소문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해 굉장한 사실들을 추측해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온 것이 아닌가고 생각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예레미야나 다른 어떤 선지자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한다면 예수의 정확한 신분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어떤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모든 의견이 일치했다. 이들에 의해 예수님의 지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들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다시 한번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예수님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파피니(Papini)]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시인을 발견한다. [부르스 바톤(Bruce Barton)]은 행동의 사람(the Man of action)을 발견한다. [미들턴 머리(Middleton Murry)]는 신비주의자 (the Mystic)를 발견한다. 정견이 없는 사람들은 곧 잘 예수님을 성자들의 귀감으로, 또한 모든 도덕적 지도자들의 영원한 머리로 높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죤 스츄어트 밀]은 아직까지 추상적인 도덕률을 구체화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좋은 예는 찹아보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로 불렀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전시대를 통해 영웅들과 성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예수께서 어떠한 계열에 속한 한 사람이란 것을 의미했다. 즉 이 말은 그보다 앞선 자와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의미 했으며,비록 그가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다만 그와 비교할 마난 수준의 무리 중에서 제일이란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보다 앞선 자도 없으며, 비교하거나 필적할 만한 존재도 없는,독특한 존재로 말씀 하셨다(그 예로 마11:2710:3724:35,요10:3014:6). [판테온]에 플라톤의 상과 나란히 예수의 상을 놓았던 로마 황제는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숭고한 찬사를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그리스도께 찬사를 바치고 있었다. 다만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니었을 따름이다. [에른스트 르낭]이 예수께 대해 "그는 하나님의 참아들들의 찬란한 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얻었다"라고 말했을 때 틀림없이 나사렛 출신의 예수에게 존귀한 영광과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세례요한, 엘리야,또는 예레미야로 보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에 대해 궁극적으로 옮은 견해일까?그리스도를 플라톤,소크라테스,석가모니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 [아사시의 프란시스][버나드][어거스틴]등 의한 사람으로 보는 이것이 옳은 견해였는가?사람들은 때로 이런 답변으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이런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여기[가이사랴]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나고 바로 단도직입적인[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질문을 어떻게 개인에 대한 도전으로 이끌어 가셨는가를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가 통상 쓰시던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대화하시던 때에도 쓰셨던 방법이다. 즉 처음에는 일반적인 화제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그 여인의 정곡을 찌르셨다. 이러한 방식은 또한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왕되심을 주장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를 심문할 때 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도전이 마치 화살처럼 갑자기 빌라도에게 날아왔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즉 이것은 빌라도 네가 스스로 판단하여 링하는 말인가. 아니면 단지 남의 말을 듣고 옮기는 소문이냐고 물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보만간에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셨다.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들은 의견이나 남을 대신해서 말하는 의견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그가 원하신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젠 여기서 예수님의 이 질문이 오늘의 세계를 향해 세가지 측면에서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역사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시이저]나 [알렉산더]또는 [나폴레옹]보다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 마치 [콜로서스] 처럼 좁은 세계를 활보하는 이 예수, 그의 대의가 수십세기를 통해 수십변 사멸했으나 다만 매번 전보다 더한 영광으로 되살아 났던 이 예수는 누구인가? 성경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마11:27)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 견습 목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온 세상을 향해 자기에게로 와서 쉬라고(28절)명할 수 있었던 이 방랑 설교자, 이 사람은 누구인가?셋째로 양심이 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말이 지금도 하나님의 예리한 검처럼 우리 마음을 찌르며 그의 눈길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그의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깨끗하게 살려는 각오를 갖게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세계는 이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또한 종교와 인생의 모든 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운명을 걸고 있다.

4. 믿음의 답변

[시몬 베드로]는 그 질문에 응했다. 그는 충동적이며 사랑에 넘치는 마음의 담대함으로 그 질문에 응했다. 긴장된 그 순간의 극적인 장면을 상상해 보라.이전에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던 질문이 던져졌다. 예수께서는 장기간의 꾸준한 개인적 훈련과 교제를 통해 제자들을 이 질문에로 이끌어 오셨으며 그 질문이 이제 여기에서 던져졌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역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아셨다. 이제 그 질문은 던져졌다. 아마도 잠시 동안은 침묵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의 열두 사람은 궁극적인 신비와 하나님의 존재의 측량할 수 없는 깊이에 직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베드로]가 그 질문에 응해 일어섰다. 그는 조잡하고 평범한 반신반의하는 답변을 훨씬 상승하여 놀랍고 굉장한 답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외침으로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베드로의 이 고백의 어느 정도의 뜻을 함축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가끔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두 말할 여지없이 그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로 인식한 것을 의미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부른 의미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기 전 이 땅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느땐가 깨달았었다. 이 사람은 예고자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이 사건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메시야 사상은 이미 오래 전에 쓸모 없어진 케케묵은 유대인들의 사상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한다. 비록 말과 개념은 틀림없이 히브리적이며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사건 자체는 전 우주적이며 영원한 것이었다라고 왜냐하면 메시야 사상이란 바로 세상의 소망이 되시며 모든 약속의 성취와 모든 기도의 응답이 되실 어떤 분이,인간의 모든 얽힌 것들을 푸시며 지상의 모든 잘못을 바로 잡으시며 하나님의 보다 나은 시대를 도래케 할 어떤 분이 올 것이라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지금 그 사상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 세대에 지침으로 주신 말씀으로 인식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함께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신성

베드로가 나타내려한 것은 이것 뿐이었는가? 그는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메시야]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상과 어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라는 말은 때때로 동의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 즈음 수개월 동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생활에서는 그 때까지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즉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대해서만 느끼던 감정을 예수님에 대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려 할 때 예수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정당하게 요구하실 수 있느니 생명까지도 그들의 선생에게 기꺼이 바치려 했다. 이 모든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외침속에 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큰 확신이 있었다. [베드로]가 이 확신에 도달하게 된 경로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경로는 그러한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였다. 즉 그는 예수님과 사귀는 삶을 통해서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한 확신이 시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어부[시몬]에게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시몬 베드로]가 일어서서 따랐을 때는 그가 따르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 당시 그가 가졌던 생각이란 단지 [여기에 내가 찾고 있던 지도자가 계시니 이제 나는 그와 함께 가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매우 초보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시작으로는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처음 시작에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도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어떠한 분으로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지는 않으셨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의 신적 신분에 대한 교리 강습을 받게 하지는 않으셨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과 만나 사귐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베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서 그 즉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은 실제로 자라고 성숙해졌다. 결국 [베드로]로 하여금 [신앙인(believer)]이 되게 한 것은 오랫동안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기까지 낮과 감을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데 있었다. 왜냐하면 매일 그는 예수께서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의 말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하고 믿기 어려운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또한 매일 일하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예수님은 어떠한 위급한 사태라도 감당하고 남음이있다는 사실을 감탄과 놀라움으로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좌절당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접촉한 후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러한 변화를 받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명백하게,이 예수가 그의 죄를 사하셨으며 또한 순종하는 삶속에서 (in servant's life) 그로 하여금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해주는 음성이 있었다.이것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를 알게된 경로이다. 결국 누구라도 이 길 아닌 다른 길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나에게 해 주신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을 구속하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의 생명을 구속해 주신다. 하나님만이 나의 존재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예수님은 나의 존재를 가득 채워 넘치게 하신다. 그렇다면 내가 어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야 신분과 신성에 대한 [베드로]의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계시로서 왔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그 지식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 지식은 [베드로]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발견이 아니었다.진리에 대한 [베드로] 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발견이 아니었다. 진리에 대한 [베드로]의 탐구가 그러한 계기가 오기 위한 길을 열어준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계시가 왔을 때의 그 계시는 하나님의 은사였다. 그 계시를 [베드로]에게 비춰주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그 확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그 계시는 그 자체 고유의 불가항적인 힘으로 [베드로]에게 부딪쳐와서 [베드로]의 마음에 확증을 주었고 그 결과 어떠한 논리적 증거와 증명을 떠나서도 그는 절대적인 확신으로 [내가 알거니와]라고 말할 수 있었다. [베드로]의 마음 어느 곳엔가에서 하나님께서 올리신 종성이 들렸으며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계시의 순간들이야말로 종교의 생명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신을 최종적으로 확신하게 하실 수 있다.

6. 반석

예수께서 그의 제자의 고백을 격렬한 감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바요나 시몬아아 네가 복이 있도다]여기에서 수년간의 모든 노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그의 영혼의 고통과 고생을 나타내 보여주는 그 무엇이 이루어졌다고 예수님은 느끼셨다. 여기에서 어떤 일-패배,사망,극에 달한 재난-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대의는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쁨에 넘치는 감사로 격앙되었다.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신앙이 우리 주님께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좋은 예증이 된다. [시몬아 네가 복이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반석]이란 말이 무엇을 가르키는가에 대해논란이 있어왔다. 그것은 [베드로]자신이었는가?아니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었는가? 그 말은 둘을 다 가리켰음이 분명하다. 교회는 신앙안으로서 또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자로서의 [베드로]와 최초 기독교인들의 세대를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신 이래 모든 세대를 통해 믿는 자, 즉 자신을 위탁하는 자들에 대한 약속이었다. 우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재료도 쓰여질 수 있는가? 우리의 믿음과 충성은 어떤 것인가? 표류하며 밀려다니는 모래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견고하고 단단한 바위와 같은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모든 기독교인이 호롤 그의 영혼과, 하나님과 직면하여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매일 성경


 이사야  11:1-10   메시야에 대한 희망
 이사야  53:       고난의 종
 마태복음 11:1-6   "오실 그이"
 요한복음 6:59-69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마태복음 16:13-21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요한복음 10:22-38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5:17-27 심판주

 

토론을 위한 문제

1.구약은 메시야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어떠한 예비적 성구들을 제공하는가?

2.그리스도께서 어째서 복음서에서 그의 메시야 신분을 비밀로 하셨는가?

3.[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했을 때 그 의미는 어느 정도였다고 생각하는가?

4.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이 20세기 교회에 대하여 어떤 의미와 관련을 갖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