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열두 제자

제자들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리스도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청년 운동으로부터 시작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생각할 때 이 점이 증명된다. 기독교사의 다른 점들에는 다소 차질이 생기는 일이 혹 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청년 단체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제자들 대부분이 예수를 따를 당시 20대 청년 시기였다. 이 점에 대하여 거의 한세기쯤 후에 사도 바울이 증거하기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5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그 중에 태반이 살아 있다](고전 15:6)는 기록을 남긴 사실을 보아서도 이 사실은 증명된다.

예수의 영적 승리는 특히 청년들의 관심을 끌었다. 복음서를 읽을 때 그의 설교를 주의해 보라 그는 헬라어 [테크나](teknia) 즉 [소자야]혹은 [소자들아](요13:33),그리고 [얘들아] (paidia)-모팔 박사는 이 말을 [젊은이들아]라고 번역했다-등의 말을 사용하였다.

예수는 그의 지상 사명을 수행할 때에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시110:3,이 시는 예수님 자신과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해당한 시라고 했다). 함께 일하셨다고 하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 박해시대에 카타콤에 숨어서 신앙의 정조를 지키던 신도들이 예수의 초상화를 벽화로 그렸는데 이 벽화에 그려진 예수는 피곤하고 나이 많은 모습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양들을 몰고 아침 언덕길을 걸어가시는 젊고 씩씩한 모습이었다. 아이작 왓츠의 찬송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신비로운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나는 그 위에서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젊으신 왕자를 바라 보노라.

젊은이들이 지니고 있는 용기, 희망,고독,쾌활성,관대심,꿈의 대망,내적 고민과 강렬하게 부딪치는 시험 등을 진정으로 이해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밖에는 또한 공상의 잠을 자고 있는 젊은이의 심령을 일깨워서 위대한 사상을 안겨 주고 훌륭한 생활의 업적을 남기도록 지도한분 역시 예수 밖에 없다. 젊은 예수, 젊은 제자들, 이들이 한 그룹이 되어 유대 전역에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일으킨 사실은 옛날 시인의 표현대로 [깊음이 서로 깊음을 부른다(시42:7)는 말과 상통한다. 피차에 허물이 없고 빈틈이 없이 감정이 서로 교차되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순결하고 또 고상하여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선망하는 마음이 젊은 제자들의 마음에서 끝없이 자라가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그리스도교가 초기에 [청년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는 표현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열두 제자에 대한 연구는 곧 청년에게 대한 연구이다. 그들은 최초부터 자기들의 지도자 예수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했고, 또 그들이 왜 예수를 따르게 되었는지,그리고 자기들을 어느 곳으로 데리고 갈지도 모르고 그저 쉬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따르기만 한다. 그들은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심령을 사로잡는 어떤 위대한 힘과 매력에 무조건 매혹되어 열렬하게 자신들을 바치고 있었다. 이러한 일종의 맹목적인 추종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비난도 받았고, 반대 세력의 모략도 받았으며, 자기들의 직업을 버리고 따라 나섰을 때에는 이중 삼중의 고민이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사도]라는 빛나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런고로 그들이 예수에게로 나아가 그 심령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켜 새 사람이 된 사실은 우리들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 성격의 다양성

제자들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성격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다. 그 다양한 성격, 피차 조화될 수 없는 인간성들이 어떻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조화되었는가?하는 점을 여기에서 밝히기로 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중에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다](사11:6)는 환상이 곧 민족주의 열심당 시몬이 로마 정부의 관리인 세리 마태와 기거 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다는 사설에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지고 연합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를 분석해 보건데 그것은 제자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정력과 활동력과 남다르게 성급한 성격을 지닌 베드로와 명상적이고 사색적이며 기도의 사람인 요한이 예수를 만나고 나서는 서로가 협조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의 성격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리가 좁혀져 가고 있어 명랑하다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진 안드레와 남을 의심 잘하기로 유명한 도마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한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열두 제자의 화합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성격을 인상 깊게 보여 주는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러가지 성격 상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된 교우들의 다양한 성격과 비슷하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말씀하신 대로 그는 행하고 계신다.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람들을 그에게로 불러 모은다. 그리스도만은 시대에 뒤떨어질 수 없다. 국가와 인종의 차별이 없이,키프링의 말과 같이 동서 양대륙이 지니고 있는 연결 불가능의 장막 조차도 그리스도 예수를 교량으로 하여 서로 통하게 되었다. 모든 성격과 기질, 계급과 단체가 모두 그리스도에게 와서 하나가 된다.

성프란체스코와 요한,번연,요한.웨슬레와 헨리.뉴만,로렌스와 아프리카의 아그레이,D.L.무디와 템플.가이드널 등이 모두 그리스도를 교량으로 만나게 되었다. 계시록이 증거한바 하나님의 성에는 여러 방향의 문이 있으며, 그 모든 문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통로라고 했다(계21;13).

3. 주님의 두가지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밝혀 보자. 마가복음에 뜻깊은 한 구절이 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를 하며...] (막3:14).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다.[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이 말씀은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께서 인간적인 동정과 인간의 교제를 필요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서에는 고독을 경험한 여러 사람이 있다. 처녀 마리아, 친구 없는 문둥병자, 벳세다 못가에 38년된 병자,유다.빌라도,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지게 외로움을 느낀 존재는 예수님이다. 날마다 대하는 세계가 그에게 딱딱하고, 적대시하고,경멸하고, 조롱의 화살을 던지고 있으며, 비관과 무관심이 폭풍처럼 그의 면전에 나타날 때마다 그들의 비록 철없이 덤비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어도 그러나 스승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제자들과 함께 자기의 슬픔과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자들이라](눅22:28)고 한다. 이 말씀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나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도 그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신다. 고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들어가리라]고 하신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심이다.] 이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사랑과 동정을 원하시는 뜻을 보여 주시는 뜻깊은 말씀이다. 또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친히 교제하는 중에 교훈하시려는 뜻이 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살고, 어떤 처지든지 그를 바라보고 그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항상 듣고, 그의 꿈과 이상과 희망에 함께 발맞추어 고락을 같이하던 제자들은 예수의 명철한 영을 나누어 받고, 그의 영안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의 놀라운 이해력으로 모든 것을 시닙롭게 깊이 이해하고 믿을만한 그의 뜨거운 정열의 불에 자신들이 뜨거워지는 이 경험이 예수와 함께 생활함으로 생겨진다. 반복하여 정리하면 예수와의 교제는 제자들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 오늘날도 참된 자녀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와 접근하여 사는 생활이다. 예수와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승가의 삶이다.

다음의 목적은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주어 파송하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기치를 든 이 전도운동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기회가 매우 좋았고, 멸망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필요성을 너무도 강열하게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혼자서만 이 일을 다 처리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붙여 놓은 진리의 횃불을 들고 열 두 제자는 방방 곡곡을 찾아가서 그 어둠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그는 이들을 택하여 제자를 삼으셨다. 고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손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그의 손이 되어 일하고 그리스도는 발이 없지만 우리의 발이 사람들을 그에게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에게 혀가 없지만 우리의 혀가 그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리스도에게 도움이 없지만 우리의 도움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사도]란 말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런 이미의 사도가 아니고는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그리스도는 오늘 당신들도 자기의 제자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신다. 2천년전,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청년들이 전 세계를 변화시켰다. 오늘도 그리스도는 남녀 청년을 택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신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시려 한다는 그 신앙을 아무도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하라.]

4. 주님의 부르심

최초의 열두 제자는 어떻게 해서 예수에게로 나아갔을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단을 내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다만 예수를 만나는 그 시간까지가 그의 철저한 제자가 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고로 그들의 최후 결단은 상당히 돌발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들이 완전한 제자가 되기까지에는 적어도 세 단계를 거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첫째,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자로서 자기의 집에서 가장 사업을 계속하면서 이따금 그를 접촉하고, 그를 만나 보고 또,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동안을 지냈고, 둘째로, 그들이 점차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자 자기의 집과 자기의 직업을 하나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직업에 등한시하며 한 동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기 일신상의 사업을 완전히 단념하고 자기들 끼리 한 단체를 이루어 예수님곁에서 떠나지 아니하며 그와 가깝게 교제하며 그와 더불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자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는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린다. 가령 베드로가 부름을 받은 사실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요한복음 1:42,누가복음 5:10,마가복음 3:13-16의 세 곳인데 그 기사가 각각 다르다. 이 셋이 반드시 가랑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다른 점은 그들이 각기 자기들이 보고 들은 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 기록들은 서로 배치되는 기사가 아니라 서로가 보충하며 더 완전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상에 밝힌 세 단체가 이 여러 복음의 기사로 잘 나타나 있다. 처음에 그는 가까이서 예수를 사귀어 보려고 했고, 다음에 그를 따랐고, 세째로 사도로서 완전히 그 사명을 맡게 되었다.

5. 열 두 사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 두 사람에게 대하여 생각하자. 안드레는 스콧트랜드를 지키는 성자로 섬기고 있다. 안드레와 스콧트랜드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안드레를 자기들의 수호사도로서 자랑하는 것 만은 사실이다.[안드레란] 말의 헬라어 뜻은 [용감하다][사내답다]는 말로서 남자의 이름이다. 복음서에는 안드레의 이야기를 별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는 베드로의 형제였다는 것만을 말하고, 뛰어난 다른 제자들의 그늘에서 빛을 못보는 듯한 느낌으로 평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이며, 그가 자기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러니까 안드레가 아니었더라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교 역사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손꼽히는 네 제자(베드로,안드레,야고보,요한)의 한 사람으로 항상 한 그룹에 끼인 것을 보아서 예수님과 더가까이 지냈고 또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예수님 곁에 있을 수 있는 그의 존재를 주목할만 하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부흥 운동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 중의 한 청년이었다. 요한은 자기의 신앙 운동에 참거하여 온 사람들에게 어느날 석양, 요단강변으로 걸어가시는 낯선 사람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요1:36)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은 요한이 말한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낯선 그림자를 따라 갔다. 그리고 물었다. [랍비여,어디 계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와서 보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그날밤, 그들이 피차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이 피차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밤을 밝힌 것만은 사실이다.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요1:39).이런 점으로 보아 안드레가 사물에 대하여 주도면밀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의의 깊은 활동은 그가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중책을 이행한 일이다. 그가 밤이 깊도록 진리의 담화를 나눈 그 다음날 아침, 즉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하던 흔적이 복음서에 보이고, 그후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에게로 데리고 왔다]고 기록했다(요1:42)

그후, 어느날, 주린 5천의 군중이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늦도록 빈들에서 방황할 때,조그만 어린아이가 가져온 떡덩이를 찾아 내어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서[여기 떡이 있나이다](요6:8)라고 말한 사람이 안드레다. 여기에서도 역시 어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그 다음 어느 날, 헬라 사람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면회하려고 벳세다 사람 빌립을 찾아서 면회하기를 간청했다. 빌립은 직접 예수에게로 데리고 가지 않고 먼저 안드레의 의견을 듣고 안드레와 같이 헬라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갔다(요12:20-22). 이런 점으로 볼때 안드레는 스콧트랜드의 성자만이 아니라 그는 모든 선교 사업을 하는 선교자들의 영원한 수호 성자라 하겠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제자들의 할 일이며 오늘도 이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지도자의 천성을 타고난듯, 그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대변자였다. 어느날,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 가려느냐?] 고 물으셨을 때,[주여! 당신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이렇게 얼른 대답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가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제기 되었을 때에 다른 제자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는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한 이도 베드로였다(마16:16).

그들의 스승을 십자가상에 잃어버리고 낙망하여 앞일을 어떻게 할까 하고 걱정들을 할 때에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고 앞장 서 나선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 이 말을 따라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요21:3). 용감하고 넓은 마음을,그리고 열광적이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는 지도자의 자질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성격에 결함도 있었다.[사탄아! 물러가라]하는 노여운 책망을 받은 사람도 이 베드로였다(마16:23).어느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마19:27) 하며 장한듯이 자랑한 사람도 베드로다. 조그마한 계집종을 무서워하여 예수를 부인한 일도 있다(마26:69). 얼마나 변화무쌍한 혼잡한 성격인가?베드로가 우리에게 가까운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런 결점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새로운 이름 [베드로]를 받은 시몬은 교회사상에 바위와같이 굳건한 존재였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실수를 많이 하지만 후일에는 하나님의 가장 강한 사람이 될 미래를 보시고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다. 그가 예수를 부인한 그 실수에서 통회하고 돌아선 그 후부터는 정말로 모래알이 변하여 바위가된듯 하였다(막16:7). [내 양을 먹이라](요21:17)는 예수님의 명령에 [주께서 아시나이다.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거듭 조아렸다. 베드로의 최후에 대하여 유명한 전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로마성에 숨어 있다가는 아무래도 잡혀 죽을 것을 안 그는 로마성 안에서 수난 당하는 신도를 버리고 어느날 도망하여 성문을 빠져 나왔다. 이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고 물았다. [나는 네가 피해 오는 로마로 가서 두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노라.]이 대답에 베드로는 문득 자기의 비겁함을 깨닫고 걸음을 돌이켜 로마성으로 들어가서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자의 영광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용감한 사람]베드로는 [저편에서 들리는 하늘 나라의 소리]를 들었다.

주님의 사랑을 받던 네 제자 중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형제가 있다. 야고보에 대한 기사는 비교적 적다. 복음서에 다만 두번 나타나는데 그것도 요한과 함께 한 자리에서다. 그러나 최초의 순교자로서 영광을 차지한 제자다(행12:2).요한은 신약의 요나단이라 하겠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의 친구 요나단은 신약에 있어서는 다윗의 아들 예수와 가까이 지낸 요한이라 하겠다.[나의 기사]는 절대 대담,절대 온순의 사람으로 맹세를 한 사람이다]라고 테네슨은 말했다.

요한에게는 남자의 대담성과 여자의 온순,이 두 가지 성격이 완전히 조화되어 있었다.예수의 최후 순간, 갈보리까지 스승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자여 보소서,아들이니이다]한 마지막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다(요19:26).또 다른 한면의 성격으로서 허락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어떤 사람에게 대하여 분개했다는 마가복음의 기사와 (막 9:38),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마을에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기사(눅 9:54),그리고 높은 자리를 탐낸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막10:35)등이다. 그러나 그 성격중 가장 깊은 것은,그가 예수를 떠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의 정결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한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를 기념하여 항상 들려진다.즉[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이다(요13;23).

또 한분의 제자 도마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의심이 많고, 그리고 불가지론자,회의론 자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별명은 아니다.그러나 예수님이 수난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 할 때, 다른 제자들은 [랍비여 금방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시나이까?](요11:8)하고 만류했으나 이 의심 많은 도마는 웬 일인지 큰소리로 대담하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말했다. 그 의심은 단순히 반항적인 의심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성격의 한 우울증이 섞여 있는 결함이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신앙 고백의 하나는 의심하던 도마가 예수를 확신한 다음의 고백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마9:9)부름을 받았다.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희망이 없는 수치스런 사람으로서 모든 국민의 조롱을 받는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그날 밤,가버나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이야기 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보면, 후에 사도 바울이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7)고 증언한대로 예수님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 준다. 이 관대한 대접을 받은 마태는 그날밤 연회를 베풀어 고귀한 손님을 청했다(마9:10).이 연회를 베푼 목적은 세리 마태에게 있어서는 세가지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첫째, 그것은 그의 영혼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는 잔치이며,둘째,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하여 자기 생활을 결정적으로 청산하고 다시는 과거의 그런 길을 걷지 않겠다는 표현이며, 세째,그의 옛날 친구들로 하여금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그들과도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을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 연회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이 유명한 칭호가 처음으로 붙게 되었다. 그러나 이 칭호가 그리스도에게는 참으로 영광스런 이름이었다.

나머지 여섯 제자에 대하여는 별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 열심히 묻는 질문가(빌립 특히 요1:4314:8),열심당이며 열렬한 민족주의자 시몬,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바돌로매(요1:45),다대오라 이름하는 레빼오(레빼오란 이름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음: 역자 주-마10:3),유다 9예수님에게[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 하시려 하시나이까 한 사람-요14:22), 그 다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그에 대하여는 아무 기록도 없다).

그 다음 예수를 판 가롯 유다,그가 왜 이 단체에 끼어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가롯 유다에 대한 문제는 더 깊이 다루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처음 그를 부르실 때는 그에게도 후일 훌륭한 제자가 될 소질이 있음을 인정했으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다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생활에 끌리어 그를 찾아 왔을 것이다. 서로가 이렇게 보는 바가 없었더라면 결코 사제지간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유다의 신비에 대하여는 17장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택하신 열 두 사람을 데리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영적 사업을 시작하셨다. 이 출발은 대답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 모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험이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것들을 폐하러 하시나니](고전 1:27).

매일 성경


 요한복음 1:35-42  두 청년과 예수
 마가복음 3:13-19  12제자들을 택하심
 마태복음 10:5-20  제자들의 임무
 누가복음 5:1-11 사람을 낚는 어부
 마가복음 10:35-45 우뢰의 아들들
 누가복음 9:57-62  주를 따르려는 자들이 거부 당함
 마태복음 10:32-42 십자가를 짐

 

토론을 위한 문제

1."제자"와 "사도"란 말의 의미를 토론해 보라.

2.처음 12제자의 다양한 성격의 의미는 무엇인가?

3.예수의 부르심은 오늘 어떤 모양들로 오는가?

4.매일의 직업이나 직장에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가장 잘 섬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