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폭풍전야

십자가의 그림자

[홀맨 헌트](Holman Hunt) 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죽음의 그림자]는 나사렛의 한 목공소에 있는 예수를 그리고 있다. 시간은 하루가 끝나갈 무렵,지는 해의 마지막 햇살이 열린 문으로 흘러 들어 오는 때이다. 긴의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젊은 목수는 옹색하게 구푸린 의자에서 잠시 동안 몸을 일으켜 양 팔을 편다. 바로 그때지는 해가 그 모습을 잡아 뒷쪽에 있는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상을 만든다.이 화가는 예수님의 사역 시초에서부터 죽음이 감돌고 있었음을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시초부터 그 종말은 명백했다. 참으로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이 사실은 명백하게 나타나 보인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타협을 단호히 거부한 순간, 세상의 권세와 공중에 있는 영적 사악에 대하여 결코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도전적 태도를 취할 것을 단연 결정한 그 순간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그전에도 오랫동안 조용히 묻혀 살면서 예수께서는 멀리 잇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셨을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은 공부하면서 [고난의 종]의 모습에(사53장) 자신이 비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린다는 것은, 또한 전생애를 바친다는 것은,하나님을 부인하고 선지자들을 돌을 들어치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고난과 종국에 가서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그림자는 처음부터 있던 것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중대한 고백이 있을 무렵에 그것은 이미 그림자 이상의 것이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의 말씀은 비록 직접적이고 명료한 것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을 뚫어 그 진리를 완전이 깨닫게 하지는 못했다. 제자들에게 그 일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일은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과 희망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생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상한 비유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문자적인 의미의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베드로는 붙들고 간하여 말하되[주여,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외쳤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방해할 수 밖에 없음을 아시고 대답하시되[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하셨다 (마16:23). 예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두려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던가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그들이 가장 좋은 지위에 대한 다툼을 계속한 사실에서 (마18:120:20), 또한 실제로 그 일이 닥쳤을 때 그들은 놀라 어쩔줄을 모르면서 완전히 절망에 빠졌던 사실에서 (마26:31.51)알아 볼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만이 그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십자가를 직면하려 나아가셨다.

바리새인들의 반대

이제 우리는 닥아오는 폭풍을 지켜보면서 갈보리 십자가 처형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 적의이 동기들을 살펴보아야겠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살펴보자.왜냐하면 예수님의 생활과 성품에 대해 주된 공격을 시작한 주역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때때로 변칙적인 사태를 낳는다.그러나 적어도 외부적으로는 그 나라에서 가장 종교적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을 모의하는 반대파의 우두머리가 된것 보다 예외적인 사건은 없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한 종교 개혁의 진정한 계승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어둡고 어려웠던 시기에 그들의 종교를 강하고 활력있게 하며 오염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신앙의 수호자로 행세했다. 義가 그들의 기조였으며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공경이 그들의 변함없는 주제였다. 또한 율법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높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주의에 의하면 예수님은 상종치 못할 인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러한 증어가 생기게 된 세가지 근원이 복음서 이야기 가운데 밝혀져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깃군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당시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매우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갑자기 널리 알려지고 민중이 그를 따르자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공공연히 선포하지는 않았찌만 그의 행동은 메시아의 행동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예수님과 같이 빈민 계급에서 나올 가능성이나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전통을 그들과 같이하지 않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그들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더우기 예수님이 그 따르는 자들을 선택하신 방식을 바리새인들 눈에 그 운동 전체가 잘못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외국인에 고용된 배교자[마태]같은 자를 택하여 제자로 삼는 대의(大義)는 분명히 의심을 받을 만했을 뿐 아니라 존경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하였다. 지각있는 바리새인이라면 누구나 가까이 오게 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하셨다. 마치 그는 명망 있는 종교 지도자들 보다 사회의 서민 층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결론은 명백했다. 갈릴리 선지자 예수가 시작한 운동 전체 위에 [이 자는 사깃군이다]라고 마치 한낮처럼 드러나게 쓰여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독특허나 죄행(罪行) 즉 멸시하는 죄를 볼 수 있다.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두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적이 있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눅18:11)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적인 정신이었다. 바리새인의 죄는 우월한 자가 짓는 무서운 범죄였다. 그 우월감의 가장 나쁜 점은 그 우월감이 주로 영적인 것에서 생겼다는데에 있다. 그들의 교만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불신앙적인 교만, 즉 선한 것에 대한 자랑, 은혜에 대한 자랑이었다. 이러한 자만의 죌 눈이 어두워져서 그들 자신의 독선에 삼킨 바 되었으며,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그들은 예수님을 사깃군이라 공언하고 몰아낼 것을 계획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간의 갈등에 있어서 두 번째 요인은 율법과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였다. 유대인의 율법을 구성하고 있는 613개의 계명을(이들 중 365개는 금지 명령이고 248개만이 적극적인 명령이라는 사실은 깊은 의미를 가진다.) 지키는 것이 바리새 종교의 전부였으며,또한 그 본질이었다. 정통과 는 이 계명들이 전 진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진리 외에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만일 누가 바리새인에게 [율법을 주었던 교사들은 오래 전에 죽은 반면 하나님은 아직 살아 계시니 지금쯤은 무언가 덧붙일 것이 있을 것이 아닌가?]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혹은 613개의 계명중 상당수가 낡고 현학적인 율법주의 냄새가 나니 새로운 빛과 진리가 들어올 여지를 주기 위해 점잖게 물러냐야 하지 않을까]라고 암시라도 했다면, 그 바리새인은 겁에 질려 두 손을 높이들고 이단 중에도 극악한 이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셨으며,따라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막2:1824).그는 오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 요구가 폐쇄된 바리새인의 마음에는 터무니 없고 용인할 수 없는 요구로 들렸다.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죽게한 것에 대한 책임이 대부분 폐쇄된 마음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점이 복음서를 통하여 명백하게 기록되었다.[죠지 메레딛]은 말하기를 "교훈을 받지 않는 마음은 인생의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를 세운 것은 바로 교훈을 받지 않은 마음이었다.

사실 이러한 면은 강조해야 할 가치가 있다.생활이나 생각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개방적이고 친절한 마음 편에 있었다. 청교도 이민의 목사였더[죤 로빈슨]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아직까지도 그의 말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진리를 더 갖고 계시다."라고 했다. 불행하게도 역사에는 [인간은 다른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 만큼 생각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버트란트 러셀]의 말을 입증해 주는 예들이 풍부하다. 또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새로운 진리의 대부분이 그 생존자체를 위해 시초부터 그 진리를 환영함직 한 사람들의 완강한 반대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적인 정직을 포함해서 모든 종띵하의 절대적인 정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는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14:6).따라서 완전히 폐쇄된 교훈 받지 않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이,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도왔던 그 날에 얼마나 비열한 것으로 드러나 보였던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지 된 세번째 요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는 예수님의 보편주의였다. 보통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인류는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유대인으로 출생한 참 유대인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별없이 멸시하여 이방이라고 부른 나머지 모든 민족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이 두 집단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다.[바리새]라는 명칭 자체가 [분리된 자]라는 뜻이었다. 유대교는 참 종교를 독접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도 전하신 시대 정신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도 계시며 만인을 위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셨다. 멸시 받던 사마리아인들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였따(눅10:30이하,요4:4이하).한 로마 군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하셨다. 그는 또한 온 세상의 모든 대로들이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로 모여드는 무리로 가득하게 될 날을 그리기도 하셨다(눅13:29).이러한 보편주의는 배타적인 바리새인들이 신성하고 가장 귀한 것으로 간직했던 모든 것을 받아 치는 격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위험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선포하는 예수를 침묵하게 만들어 버려야만 했다.

3. 사두개인들의 반대

바리새인들의 반대는 이와같이 여러가지 로선을 따라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두개인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는 종종 마찰과 긴장이 고조되어 왔으며 때로는 공공연한 투쟁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공통의 적의가 그 간격을 메꾸고 그들로 하여금 단번에 친구가 되게 하였다. 사두개파에 대하여 유의해야 할 세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옛 귀족계급 출신들로 이루어진 귀족당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국내외에서의 국가 이해를 좌우하는 정치적 당파였다. 셋째로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제사장 당파였다. 사두개파의 특성은 철저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였다. 그들의 지위가 기존 질서의 유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은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모든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도전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었다. 종교는 정치의 시녀로 전락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신앙은 반대당인 바리새파가 가지고 있는 어떤 교리들을 부정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받아들였으나 역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에 참가했던 전통을 부인했다. 그들은 메시야 사상을 부인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과 개인의 영생에 대한 믿음을 부인했다. 사두개파의 사상과 예수님의 사상이 조만간에 공공연한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은 거의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와같이 세속적인 사제귀족당에게는 예수님이 극히 위험한 인물로 보였다. 예수님이 자유로운 동안은 그들은 불안을 느꼈다. 그 위험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국을 어떤 움직임에 휩쓸리게 함으로 로마와 충돌을 일으켜 기존 정치 질서와 그들 자신의 안락한 지위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산종교가 죽은 종교에 끼치는 더 깊은 위험이 있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검과 같아서 겉모양이나 거짓,비현실성을 꿰뚫었다. 그 말씀은 정직으로 타오르는 말씀이어서 불성실한 것을 두려워 떨게 했다. 그 말씀은 살아 있었고 헤아일 수 없었으며,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었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두개인들은 그 말씀을 증오했다. 또한 그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를 더욱 증오했다. 그들은 저 말이 조용해지고 저 사람이 죽기 전에는 우리는 평안하지 못할 것이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군중의 반대

이런 상황에 또 다른 하나의 요인이 끼어들었다.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에 대중이 그를 외면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사여 가초기의 굉장했던 인기는 시들기 시작했고 그를 숭배하고 따르던 민중의 수는 현저히 줄어 들었다. 이러한 대중 감정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의 [좌절된 기대]가 부분적으로 이 사태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의 권능있는 역사를 보고,또한 권위 있는 그의 말을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로마 정권에 대한 다음 번 반역 폭동에서 그들을 이끌어 줄 바로 그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좋은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예수가 그들에게는 못마땅했다. 왕 위에 오르려고 시도함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실현시켜 줄 수 있던 좋은 기회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말만 했던 그는 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한번은 그들이 억지로 예수를 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요6:15).최후로 꺼져가던 이러한 기대가 종료 주일날 예루살렘 입성 때에 다시 한번 타올랐다(마21:8이하). 이와 같이 민족적인 지도자로 삼으려는 요구에 보응하기를 한결같이 거절하신 것이 거대한 잡재지지 세력으로 하여금 공공연한 적의를 갖게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하나의 요인은 바리새인들이 민중으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고의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의심의 씨를 뿌리려고 애썼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마자 이러한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대표들이 파견되었다(막3:22). 어떤 반대의 흔적이라도 불씨를 부채질 하여 타오르게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막2:67:1).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유대 민족의 공인된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다.따라서 예수님에게 해로운 소문을 퍼뜨리는 그들의 공작은 자연히 쉽게 끌리는 민중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만일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셨다면 일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수단을 쓰시려 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교묘하고 간악한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그 해독은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을 떠나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과 그가 요구하신 것들 때문에 멀어졌다. 그 복음은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요구는 엄중하였다. 산상보훈은 만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보통 자연인에게는 전혀 실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것을 선포한 예수는 견딜 수 없는 인물이었다. 예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는 통속적인 의미의 "대중적"인기를 얻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침없이 "그리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고 말씀하셨다(마7:14).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일곱번의 일흔번을 용서하라는 명령은 과격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다(마5:4418:22). 어중간한 태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셨다(마5:30). 이러한 조건으로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히 영웅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은 영웅적인 것이며 지금이나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사실이 종종 흐려지고 망각된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 자신이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는 그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않은 채 단순히 그를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엄격한 요구는 곧 한때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많은 사람들의 열의를 식어지게 했다. 가라지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곧 싹이 터서 밝은 희망을 주지만 오래지 않아 시들어 버린다는 비유의 말씀은 바로 이런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마13:5-6). 예수님께서 전하신 바로 그 복음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친구에게 적으로 변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근거 위에 세워진 세상은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 영웅예수

이아같이 어두운 그늘이 짙어지고 폭풍이 거칠어져 가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의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대담한 일격을 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자신에 대한 반대를 그 본거지에서 맞 부딪쳐 보려고 했다. 그 싸움을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끌고 가려했다. 바로 여기 하나님의 도성에서 최종적인 계시가 주어져야 했으며 어둠의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져야 했고 구속적 사랑의 완전한 희생이 열납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였다.](눅9:51) 이때부터 한결같은 눈부신 불꽃이.즉 예수님의 영웅적인 정신이 한밤중과 같이 짙어가는 어둠을 통해 타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나는 반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이와같이 당당하게 확고한 시선과 발걸음으로 사랑의 무기와 하나님,그리고 자신의 불굴의 정신만을 가지고 악의 세력이 진을 치고 그를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셨다. 복음서 기자가 이 최후의 행진의 한 장면을 묘사하여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막10:32)고 기록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벵겔]의 훌륭하게 표현된 것처럼 [예수께서는 열정에 사로잡혀 계셨다]만일 복음적인 기독교가 예수님의 말할 수 없는 온유함을 강조하면서 종종 타오르는 예수님의 영웅적인 정신을 흐리게 해 왔다면 여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파죽지세로 휩쓸고 가시던 그 노상에서 그의 영웅적인 정신을 재발견해야 하며 그 정신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마음과 양심을 감당할 수 없는 마력으로 사로잡히게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감상주의와 불성실한 것을 참지 못하는 오늘의 세계가 종교는 많은 표어가 아니라 용감하고 아름다운 생의 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지금 또한 교회의 참성도들은 무익한 체념의 한숨으로 [주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자들이 아니라 마치 전승자의 외침 소리와 같이 [주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며 뛰어 나가 천국을 취하는 자이며 힘든 길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그 길을 찬송하며 걸어가는 자, 직장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는 젊은이,그리스도의 법을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법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이러한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도자이며,사령관이다. 여기 십자가에로 나아가는 노상에 우리가 기꺼이 위해 죽을 수 있는 지도자,영웅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6. 변모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시기 직전,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난에 대해 그를 강하게 해 주었던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후 엿새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요한을 데리고[헬몬]산으로 가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예수의 용모가 변화했다(마17:1이하,막9:2이하,눅9:28이하). 이 놀라운 사건은 신비에 싸여 있어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 틀림없지만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체험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이 체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영적 체험이었으며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영적 환희의 체험이었다. 보이지 않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제적인 세계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출현했다. 마치 오래 전 도단성에서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이 갑자기 하나님의 불말과 병거를 보게된 것처럼(왕하 6:17)제자들은 천사의 무리가 예수님과 그들 주위를 둘러 서서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을 때 그것이 예수님의 영혼에 얼마만한 힘을 주었겠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찬성의 외침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느니 일에 큰 이해 관계를 갖고 계시며 그 어두운 그늘과 번개구름 그리고 무서운 비극 배후에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승리로 관씌울 것을 약속하는 영원한 권능과 사랑이 있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었다. 그 거룩한 순간에 제자들이 이전에 보지 못했던 한 빛이 예수님의 얼굴에서 비쳐 나왔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에,

예수여, 이 눈이 주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지 못함은 감각의 휘장이 주의 영화로운 얼굴과 나 사이에 드리워져 가리우고 있음이라.

고 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여기 [헬몬산]에서는 마치 그 감관의 휘장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걷어진 것처럼 예수님의 인간모습을 통해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 계시되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

신비로운 명상, 한 없이 깊은 영교,영혼의 환희 높은 곳에서부터 넘쳐 흘러 들어오는 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얼굴을 어떤 천사의 얼굴보다 밝게 빛나게 했던 그 기이한 순간의 체험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변모에는 주의깊게 복음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여기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새로이 최종적으로 헌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희생의 제단에 올려 놓았다. 여기에서 구속주로서 최후의 무서운 사명에 그 자신을 내맡겼다. 나사렛에서 시작되어서 요단강에서 인침을 받고 갈릴리 사역기간을 통해 심화되었던 그 무엇이 여기[헬몬]산에서 그의 존재에 넘쳐 흐르는 환희의 열정으로 십자가를 수락하시는 순간 완전하게 되었다.[오 하나님이여, 내가 당신의뜻을 행하러 왔다니아.]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참뜻은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쓴[킹츠]의 싯귀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귀를 기울인다. 여러번 편안한 죽음을 얼마 쯤은 사랑했다. 명상하며 쓴 많은 詩 속에서 부드러운 이름으로 그것을 불러보았다. 나의 고요한 호흡을 대기속으로 데려가도록 이제는 죽는다는 것,한 밤중에 아무 고통 없이 끝나버린 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 풍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을 예수님 속에서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예수님]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생명을 강렬하게 사랑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의 수난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고 상사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못된다. 그는 죽음을 증오했다. 사망은 그가 파멸하려고 오신 악한 권세중의 하나였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이 전부였다. 세상을 구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만일 그 구속의 성취가 지극한 희생의 길에 있다면 사망을 기꺼이 맞으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다. 그는 생명을 매우 사랑하셨다. [변모]의 희열과,함께 절대적인 자기 헌신의 기쁨,그리고 그 순간에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그 얼굴에서 비쳐나와 놀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발 아래 경배하게 했던 거룩한 기쁨이 빛이 뒤섞여 있었다. 예수님 생애의 한 고비였던 신비스러운 사건 한 복판에서 도전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린다.즉 우리가 창조된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음성이다. 그 뜻에의 순종은 희생과 자기 부정,그리고 십자가의 험한 길을 의미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만 기쁨을 발견할 수 있으며 평화와 삼이 태양처럼 밝게 빛나게 된다. 자기 헌신의 길은 하나님의 정도이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자는 길을 잃어버린 자이다.

매일 성경


 마가복음  3:22-35   비난빌으신 그리스도
 누가복음 11:37-54   바리새 정신
 마태복음 21:33-46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함
 요한복음  6:60-71   대중의 인기가 사라져감
 마태복음 16:21-28   십자가의 그림자
 마태복음 17:1-13    변모
 히브리서 10:1-13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심

 

토론을 위한 문제

1.예수께서 사역 초기부터 십자가를 직시 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2.예수님의 멧시지 가운데 어떤 요소들이 그로 하여금 대중의 인기를 잃게 했는가?

3.제자들에게 있어 [변모]의 주된 의미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주님의 [변모]는 어떤 의미를 갖는다?

4."교훈 받지 않는 정신은 근본적으로 불신앙이다. 이말에 대해 토론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