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죄와 그 해결

1. 구주 예수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마1:22).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파괴된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여 아주 새로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자기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한결같이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세계는 심한 상처를 입고 더럽혀진 세계였다. 예수가 바라보는 곳마다 거기에는 악마의 무서운 세력이 움직이며, 그가 관계를 유지해야 할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대로 버려둔다면 사람들은 그 악의 힘에 붙잡혀 인간성은 훼손받고 한 강한 원수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버릴 뿐이었다. 그 원수가 무엇인가?그것이 바로 죄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아니될 일이 이곳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땅 위에서의 그의 일은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부자관계를 회복함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과제는 현재 두가지다. 첫째, 예수님이 인류의 불치병인 죄에 대하여 어떤 말을 했으며, 또는 어떤 태도를 가지셨는가 하는 점과, 둘째, 이 질병에 대하여 어떤 처방을 가지고 치료하셨던가? 곧 죄를 용서하심으로 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그 말의 단수로서 표시되지 않고 복수로 표시되었다. 꼲 [Sin]이 아니라 [Sins]였다는 점을 특히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죄를 설명했으며, 사변적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죄를 다루었다. 가령 죄의 기원 같은 교회적인 문제를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았다. 현대인은 환경 유전 때문에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는 사상을 지니고 있지만 복음서에는 그런 기색이 없다. 생명의 파괴를 결코 그 어떤 사건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은 같은 형제로서 서로 도와야 하고 각자의 개인적인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죄가 어디서 왔는가? 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죄가 어디서 왔는가?또는 이런 죄를 왜 우주에 용납하고 계시느냐?등의 문제를 그는 죄관에서 별로 다루시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 고심하신 문제의 초점은 그런 이론이나 설명 이상의 큰 문제였다. 즉 더 실제적인 문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방황하는 아들이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가?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더욱 중대시했다.

2. 예수님의 죄관

죄의 실존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막아버리는 모든 장애물이라고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신 예수님의 뜻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죄는 어떤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유대 교법사들이 가르치는 이상의 것이다. 저들은 말하기를 율법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이 율법에 대한 위반이 곧 죄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깊은 의미에서 말씀하셨다. 그는 랍비들과 같이 의식적인 의를 생각하시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셨다. 이렇게 생각하시므로 예수는 누구보다도 먼저 죄의 내재성(Inwardness of sin)을 말씀하셨다. 산상보훈에서 그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죄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생각과 욕심으로 범한다고,또 죄는 육체에 있음과 같이 마음과 정신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5:2127).

바리새인들은 언제든지 죄를 외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겉으로만 깨긋하고 보기에만 아름답고 율법의 조문에나 맞춰 행동하면 된다는 천박한 생각을 그들은 품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적,정신적인 죄를 가장 큰 죄로 말씀하셨고 이 내재적인 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장 엄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죄를 말씀하심에 있어서 문제보다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 마음 곧 그 인격의 중심이 어떠한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을 저 중요시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히나니라](마15:18). 사람의 깊은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죄는 이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둘째, 죄는 사랑하는 마음을 손상하는 것이다. 위에서 마음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결국 상대적으로는 옳다 하겠다. 어떤 의미로서는 [너는 율법을 파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네가 깨뜨림을 받을 수는 있다. 이 경위를 깨닫는 것인 예수님이 보신 바 죄에 대한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이르는 첫 걸음이다.

죄는 도덕 질서를 손상하지 않는다. 이런 비인격적인 것은 고충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는 사랑을 상해하며 사랑은 죄 때문에 무섭게 고통을 당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함이 몇번이냐?그러나 너는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탕자의 이야기를 상기해보라. 가장 심각한 것은 객지에 유리 걸식하며 방황하는 그 아들의 슬픔이 아니라 그 아들을 내어 보낸 날부터 걱정하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눅 15:11).예수님의 가르침은 소요리 문답서에 [하나님의 율법과의 일치성을 겸한 것이다. 율법을 거스림이 죄다]라고 정의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주의 움직이지 않는 법칙에 대하여 인간의 두뇌로서의 위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에다 주먹질을 하는 행위이며 사랑의 십자가에 또 한번 주님을 못박는 일이다. 즉 사랑하는 마음에다 상처를 주는 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죄를 에누리 한다거나 슬쩍 눈감아 버릴 수는 없다. 예수님 시대의 어떤 사람은 죄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너무 약하다고 공박도 했다. 그를 [죄인의 친구]라고 한 그 일이 오늘에 와서는 그의 영광이 되었지만 그 때에는 그를 비웃고 비난하는 말이 되었었다. 즉 예수께서 모든 종류의 죄인들과 가까이 접촉하며 지내는 그 태도가 비평가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태도를 보고 비평가들은 죄에 대한 그의 태도가 너무 약하다고 비난했다. 또 이 태도를 예수님 성격의 한 결점이라고도 생각했다(마11:19).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이 상한 사람들을 애무하는 동시에 그는 한편으로 그들을 아프게 하는 모든 악을 몹시 미워하신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렸고,또 분명히 그 마음을 무시했었다.

그는 어그스틴처럼 [아름다운 죄들]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밀톤의 사람은 마술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예수님은 죄를 마술로도 생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죄는 으례히 준엄하게 다루어야 하며 모든 죄는 반드시 그 정체가 들어나고야 말 것이다.하이네는 [물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왜냐하면 이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노래를 했다. 예수님은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시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사랑하지 못하는 행동과 그 모든 부정한 생각을 예수님이 미워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복음서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불꽃 같은](계1:14) 그리스도의 눈이 죄를 가볍게 보실리 만무하다.가볍게 보셨다면 예수의 도덕의 준엄한 모습을 어디서 찾아볼 것이냐?그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마8:11,눅15:4824),또는 [멸망하는 존재](마 18:14.요3:16)라는 의미로서 말씀하셨다.

결국 그가 죄인인 우리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 죽음이란 참담한 행동으로써 죄에 대한 그의 무자비한 적의를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죄에 대하여 가장 심각하고 준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죄의 결과

이제 죄의 결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먼저 죄는 표면으로 나타나는 징계를 받게 된다. 죄와 고통의 문제는 종교 생활에 있어서 가장 영구적인 문제이며 예수는 또한 이 문제에 대한 학설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든지 사람의 말에 주의하시고, 사람의 죄는 반드시 보응을 받는다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 세계는 도덕적인 세계요 그 중심에는 정의가 좌정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죄의 결과로 벌을 받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영국의 소설가 찰스.킹슬레는[기계의 바퀴가 그 고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멈추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치신 병자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기 위해](요5: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오는 이런 외부적인 형벌은 그들의 내적인 결정으로 말미암아 감소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우선 양심의 결정에 대하여 말해보자.[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이는 그 약한 아들의 양심이 이 고백을 하게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요8:9) 할때에 그 악한 군중에게도 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가해하지 아니하고 모두 흩어졌다. 베드로로 하여금 대성통곡케한 것도 이 양심이었다(마26:75).가롯 유다는 자살로서 그 범죄의 형벌을 덜어 보고저 했으니 이는 양심의 가책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또 죄의 결과는 우리를 노예화시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의 선교의 중심 목적은 [사로 잡힌 자에게 해방을 준다](눅4:18)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되느니라](요8:34).사람이 한번 범죄하게 되면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기보다 그 죄의 걸음을 그냥 계속하려 하여 [노우]하기 보다는 의지적으로 그의 종이 되기가 쉽다. 마카스 아우헤리우스는 인간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은 무엇이든지 당신 마음에 간직한 색깔로 그려진다. 마음은 그 기름으로 물들여진다.]

죄인은 비록 그가 노력하기는 할지라도 그 노력으로서 그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죄는 그를 그 죄의 길로 돌아가는 채찍이 되어버린다. 즉 그의 의지는 필경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

또 죄의 결과는 그 마음을 굳어지게 한다 .예수님이 헤롯 앞에서 서 계실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눅23:9,빌라도 앞에 섰을 때와 비교하라 요19:33). 그의 침묵을 하나님 아들의 면전에 앉은 헤롯의 정신적 기능위축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굳어짐이라고 한다. 어떤 영혼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된 사실이 아니다. 인간을 어떤 암흑 속으로 몰아 넣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으리 만큼 죄의 길로 달려간다.

죄는 판단력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며, 계시의 빛을 막아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주 무시하리만치 그 마음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죄의 보응이다. 미국의 시인 휫티어의 시 한귀를 들어보자.

영원히 자비의 자리에 사랑의 밝은 빛이 비치지만 습관에 매인 너의 발은 이 좋은 자리에 오려해도 올 수 없으리라.

너의 눈이 보기를 거절하고 너의 귀가 하늘의 환영을 못듣나니 너는 하나의 매인 사람 너 자신 어두운 감방에서 신음하누나

죄의 결과는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지게 한다. 모든 축복 중 가장 귀한 축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죄는 이 교제를 언제나 방해한다. 그 아버지 집에서 탕자가 받을 흡족한 사랑이 있고, 또 풍성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멀리 있는 동안에는 그 아버지 집의 풍성한 축복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졌기때문이다(눅 15;13).

하나님을 보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다(마5:8).그러나 죄는 이 청결을 짓밟고 그 환상을 끊어 버린다. 죄 지은 사람의 가장 서글픈 운명은 그의 고독이다(눅 15:4). 그 고독이 가장 불행하다는 것은 그의 형제나 집을 떠난 사실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 더 무서운 결과를 그에게 가져왔다는데서 알 수 있다.

또 죄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심는대로 거두리라](갈6:7)한 말씀은 심는 사람만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은 좋은 일에만 관여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슬픔과 고통과 눈물도 함께 나누게 된다. 한사람의 탐욕으로 가난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게 되고(눅 20:47),아들의 타락은 반드시 그 아버지에게 고통을 준다(눅 15:11). 때로는 남의 실수 때문에 애매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경우가 있다(마18:6),이것을 우리는 인간 생활의 연대성이라고 말한다.

[우리 하는 일 하나 하나가 다른 사람 마음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고 테니슨은 노래했다. 타락한 아들은 자기의 비참한 구걸의 생활이 자기 혼자만의 문제이고 다른 사람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먼 지방에 가서 허랑방탕한 그 생활의 악영향은 다른 사람에게도 미치게 되었다고 하겠다. 자기도 그 실수의 값을 받고 또 다른 사람도 받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리차드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짖게 했다. [오! 하나님,나의 간곡한 기도가 당신의 진노를 진정시킬 수 없사오면 당신은 그 진노를 내게만 베푸소서,다만 내 한몸에만 당신의 노여움을 나타내소서.]

그러나 그럴수는 없다. 죄의 비극은 항상 다른 사람을 울린다. 그리스도가 시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 자신은 누구 보다도 비통을 겪었음을 우리는 안다. 죄악의 최종적인 결과는 심판을 받는 것이다. 예수의 교훈에서 죄인의 영벌을 선고하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것을 될 수 있는대로 빼어 버리려는 노력을 하는 이도 있으나 이런 노력은 그리스도의 생각에 반대되는 것이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중에 강하게 주장되어 있다(마25:,눅 12:). 예수의 종교에서 이런 사상을 빼어 버리는 것은 복음서에 대하여 몰지각한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항상 회하적으로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가 이 제목을 말씀하실 때는 언제든지 현세의 심판은 받지 않게 되는 수가 있을지라도 내세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받게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4. 죄를 치료하는 길

예수님은 질병을 다만 진단 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그 치료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 치료에 대한 말을 해보다 그 치료 방법은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깨뜨려진 관계의 회복,곧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죄의 형벌을 경감해 주려 함은 아니다.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도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예수께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눅 23:43) 하신 말씀은 그 죄를 완전히 지워 버리셨다는 말씀이지만 그는 그 죄 때문에 사형은 받아야 했다. 죄의 값으로 육신의 죽음을 맛보기 전에는 용서 받는 길이 없었다. 용서와 이런 외적인 형벌을 분리할 수는 없다. 용서는 그 용서 받은 사람의 모든 생활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런 변화는 은총의 결과다. 도대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되기만 하면 죄의 결과로의 형벌쯤은 매우 적은 사건이다.그러므로 용서란 것은 본질적으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는 어떠한 것인가? 그는 용서의 영광스러운 현실성을 강조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를 등한시 한다. 어떻게 과거의 사태가 꼭 그대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고 죄는 두 사이의 관계를 비참하게도 끊어 버렸다. 전날의 화친은 그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말을 들어보자. 즉 [나는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소서](눅15:18]했다. 사람들은 빚진자와 같이 자기의 짊어진 채무에 대하여 영원히 또 완전히, 갚을 수 없는 것으로 느끼기도 하지만 그 채무를 이행치 낳아 그 빚 청산이 되는 수도 있다(마18:23이하.눅 7:41이하) 그런 낙망자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하고도 결정적은 회복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즉 그 탕자가 이제는 [품군]의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심정을 품었지만은 그 아버지는 전날의 그 애정으로 아들을 맞아 들었다(눅 15:20). 채권자는 그 빚진자의 의무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눅 7:42).집행 유예의 기간도 없애 버리고 다만 즉시로 두려움이 가득찬 심연으로 부터 영원한 사랑의 품으로 들어올려 기쁨을 회복하게 하고 몹시 상심하고 떨고 안타까워 못견디는 심령으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눅 23:43) 이 사죄의 은혜가 깨뜨려진 부자 관계를 회복 시킴에 있어서 사람이 주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동이시다. 죄인의 편에서 용서의 은헤가 올리가 없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편으로부터 오는 은사라야 한다. 사람이 서두른다 하여 될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야만 비로소 용서의 대은을 받게 되는 법이다. 브라우닝은 [요하네스 아그리콜라]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나님이 오실 길을 만들라 그의 사랑을 바라기만 하며 그는 자기의 바른 손으로 값을 내셨다.

포도원 품군들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곧 해결된다. 용서에는 공적이 문제될리 없고, 다만 은총으로 될뿐이다(마20:1-6). 용서하는 사랑이 없다면 회개라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까 회개 조차도 하나님의 창조요 인간의 제품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과 사랑본 참회를 일으킨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 한 후에 일어난 후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도리켜 베드로를 보시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1) 한대로 그리스도가 그것을 일으켰다. 언제든지 또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이 주동이 되신다. 갈보리 산상에서 이루신 구원의 능력의 비결 하나는 십자가의 광경이 사람의 마음에 죄로 말미암아 느끼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돌이켜 저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함에 있다. 참회의 행위를 내포한 사죄 은총의 경험은 곧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제 사죄에 대한 예수님의 중심적 위치를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의 활동이 아니면 용서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용서를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는 그 용서를 구체화 시켰다. 예수님을 만나는 죄인들은 그 자신에게 미치는 두 가지 영향을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무죄성, 그 결백성이 죄인들의 심령에 불을 붙인다. 그의 거룩함은 거울과 같아서 그 지성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때 그 경험을 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로써 말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요4:29).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쳐다볼 때 죄인들은 그 품은 바 실망을 쫓아버리고 큰 희망으로 재생하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 갔을때,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여러 사람앞에서 부끄러워 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문제에는 개의치 않으셨다. 그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인간의 자기 가치를 발견케하여 그 길로 구원에 이르게 했다(눅 19:6-7).예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저들 자신 조차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데 자기들을 믿어주는 위대한 한 어른이 계셔서 그 어른과 함께 어떤 위대한 아름다운 확실한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감정으로 말미암아 사라졌던 희망이 소생하고 용서해 주는 사랑의 기적이 다시 새롭게 된다. 예수님의 그들에대한 태도 그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사죄의 은총의 사실임을 믿게 한다. 처음에는 이를 잘 모르나 점점 이 사실이 확실해져서 그로부터 오는 사랑이 인간의 비애와 고통의 심연에 빠졌던 그들을 끌어 올려 비록 그들이 서 있는 그 수치의 자리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자리로 바뀐다.

다음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그의 사죄 은총과 직접 관게되어 있음을 복음서는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마20:2836:28). 이미 생각한 바와 같이 죄악의 본성을 폭로시키는 그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 어떠함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의 세력에 끌리어 십자가로 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를 선택했다. 즉 자유로이 길을 택하셨다. 이 십자가 죽음의 의의에 대하여 제19장 마지막에서 좀더 생각하자.여기서 우리는 특히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거기서 예수님의 사랑만 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보며 그 아들의 희생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희생도 그 십자가에 나타났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갈보리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강한 사실이며, 또 그 구원은 이 십자가에서만 이루심을 알린다.[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다](고후5:19).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사죄 은총의 결과를 말씀하셨다. 사죄 은총을 받은 사람의 생활에는 두 가지 관계가 나타난다. 그는 사랑을 추모하게 한다. 그는 결코 실망하지 아니한다. 사랑은 항상 그에게 임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옥합을 깨드림은 큰 용서를 받게된 심령이 경험하는 새로운 창조의 사랑의 상징이다(눅 7:37이하). 그 결과는 또한 선을 추모하게 한다. 용서는 한 재생력으로서 사람들의 성격을 새로워지게 한다. 따라서 희망은 소생한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삭개오는 즉시로 그 자신이 자유의사로 회개했기 때문에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슴으로 그 자신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눅19:8).베드로로 하여금 위대한 사도가 되기는 그가 대제사장 영문 뜰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용서를 받으며 [내 양을 먹이라]는 자비스러운 말씀으로 격려를 받아그 자신이 자의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다시금 내어 맡겼기 때문이었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항상 자유로운 용서는 그저 죄를 크게 덮어주기 때문에 죄인들의 도덕력을 박약하게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사죄의 은총을 받음에는 언제든지 크게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며 따라서 사죄은총을 받은 자의 제일 큰 의무는 그의 도덕적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함에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몸을 바쳐 사는 사죄은총 받은 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신앙의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성격을 창조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의 걸음을 걷게한다. 그것이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것이 은총 안에서 사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신으로서 영원히 살게한다.

매일 성경


 마가복음  7:14-23   죄의 본질
 누가복음 22:39-44   그리스도가 죄에서 치룬 대가
 마태복음 25:16-31   하나님의 심판
 마가복음  2:1-12    예수 안에서 구현된 용서
 마가복음 15:1-10    용서의 기쁨
 누가복음 19:1-10    용서와 회수
 누가복음  7:36-50   용서받은 자의 사랑

 

토론을 위한 문제

1.오늘의 우리는 연합생활에서나 개인 생활에서 "죄 의식" 을 상실했다는 것에 동으하려 하는가?

2.용서의 '형제면제'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3.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진노"라는 어떤 의미인가?

4.십자가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성취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