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사회정의(해방신학 포함)


대부분의 한국인 선교사는 복음주의자로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본 제목이 얼마만큼 현실감있게 닥아올른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정의에 대한 논의는 대개의 경우 자유주의 신학자 세계에서 다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선교지에서는 신학 논쟁보다는 원초적인 단순한 복음전파가 우선하기 때문에 사회문제나 정치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자세입니다. 선교지에 이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건들이 자신의 선교 사업에 지장이나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선교사는 이같은 사안에 대하여 언급하기조차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5공화국 시절에 미국인 선교사가 정치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 추방되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대부분의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하여는 철저히 함구하면서 더러는 "세상 권력은 위에서부터 주신 것이니 이에 순복하라"(참조:롬13:1)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계의 목사나 인사들이 그들의 발언과 행동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복음주의 쪽에서는 원했든 원치않았든 당시의 정권에 타협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 등 정부에서 반국가 또는 공산주의로 몰아세우는 무리에 대하여 정부의 공격에 박자를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사회정의"란 말이 빈번하게 들려왔습니다. 사회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됩니다. 운동권 학생들이 부르짖는 투쟁과 혁명을 말하는 것인가? 또는 야권 정치인들이 말하는 어떤 것인가? 아무래도 기독교인이 말하는 사회 정의는 그 이상이어야 한다는 물질적인,물리적인 사회적인 것 이상의 것을 논급하여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습니다.

지난 정권이 초기에 내세웠던,참으로 귀가 번쩍뜨일 구호가 있었습니다. '정의 사회 구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나라의 정의 사회 구현에 공현을 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스럽습니다.

사회 정의를 말할 때 흔히 사용되는 양극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The Oppressors and the Oppressed),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The Haves and the Have-nots),상류계급과 대중(Class and Mass),고용주와 피고용인(Employer and Employes),유산자와 무산자(Bourgeoisie and Proletariat) 등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의 단어들은 한결같이 사회적,정치적,경제적인 사안에 관심을 가집니다. 본인은 먼저 이와같은 양극적 어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합니다. 양극의 어휘는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를 규정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이해를 구하면서 말씀드립니다. "독짓는 늙은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건의 살인으로 시작되어 여자 주인공의 자살,그리고 주인공 늙은이가 타오르는 가마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또다른 영화 "반노2"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끝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은 "다 죽어버려!"라고 절규합니다. 전혀 다른 시기에 보았지만 두 영화를 본 후의 저의 반응은 거의 같았습니다. 첫째로 두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피해자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두 영화 모두 그 어느 장면에도 교회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현대인은 모두 가해자 없는 피해자들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독재자들이나 폭정을 베푼 자들도 모두 역사의 마디 속에 얽혀들어간 피해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과오를 묽히지는 말씀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회정의의 혼란 속에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는 교회를 세울 틈이 없을 만큼 교회의 수가 불어나고 있다는데, 정작 교회의 역활이 필요한 곳, 필요한 때에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사회에서 정의가 송두리채 사라져 버린 듯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 교회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회정의를 논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어휘인 "계급"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군대처럼 계급장을 달고 있지 않는 한 어느 개인이 앞서 언급한 바의 어느 계급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단정하는 것은 꽤나 복잡한 일입니다. 흔히 언급되는 계급의 분류를 보면, (1) "전통적 계급"으로 우리나라의 반상제도, 인도의 Castes등이 있으며,(2) "사회적,정치적 계급"으로서 그 사람의 직위나 지위로 규정되어지는 계급이 있고, (3) "경제적 계급"으로서 개인 소유재산의 차이,수입의 다소 등에서 비롯되는 계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삼자가 항상 완전히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일방이 타일방과 호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같은 현상은 후진국으로 갈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한국인 선교사,백인선교사등이 함께 일하는 케냐의 한 대학 안에 세 종류의 계층이 있습니다. 첫째 계층이 교수들로서 주택의 크기가 50평입니다. 전기와 더운물이 있으며 연료로는 전기나 가스를 사용합니다. 화단과 채소 밭에 수도물을 뿌릴 수 있습니다. 첫째 계층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선교사들은 승용차를 가지고 있으며 자녀들을 등록금이 비싼 학교에 보냅니다. 현지인 교수는 자기 차가 없으며 인근의 등록금이 저렴한 학교에 자녀들을 보냅니다. 둘째 계층은 학생가족들입니다. 이들의 주택은 15평 내외이며 더운 물이 없습니다. 연료로는 산에서 주워온 나무나 값싼 숯을 사용합니다. 전기는 있으나 전열기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으며 밭에 수도물을 뿌릴 수 없습니다. 이들의 자녀들도 등록금이 저렴한 학교에 다닙니다. 세째 계층은 이 학교에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주택은 10평 내외이며 거실하나 침실하나 입니다. 전기 없는 것이 위의 두번째 계층과의 구별되는 차이입니다. 물은 무료로 공급하지만 밭에 뿌릴 수 없으며 식수, 목욕,세탁등 긴급한 생활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계층간의 간격은 앞으로도 그다지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의 완화를 위하여 직원회에서 몇차례 토의하였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록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회정의의 문제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구약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에 나타나는 분쟁의 대표적 본보기로는 라반과 야곱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참조 창31:1,7,41).이 경우에는 야곱이 라반의 불공정한 처우로부터 탈출함으로 해결됩니다. 정치적인 압제의 경우로는 르호보암의 정치백서에서 나타납니다(참조 왕상12:10-11).그 결과 나라가 양분되고 우상 숭배가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욱 큰 문제로 발전되고 맙니다. 아합왕은 사회 정의의 문제에 관한한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적절한 본보기일 것입니다. 정권을 이용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습니다(참조:왕상 21:1-6).아합과 엘리야의 대결을 정치와 종교와의 충돌의 예가 됩니다(참조:왕상 19:1-2).

신약에서도 양극적 대결 현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헤롯의 영아 예수 살해 기도는 정권유지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근원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였으며(참조:마태2:1-13),헤롯과 세례 요한의 만남은 정치에 대한 종교의 비판으로 우선은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승리로 매듭지어집니다(참조:마태14:1-11).종교지도자들과 예수의 충돌,유대교와 바울의 충돌 등은 기존 종교 세력과 신흥 종교간의 대결로 나타납니다. 이상하리만큼 로마 식민 정권에 대하여는 예수와 바울,그 밖의 모든 신약 기자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회정의의 상실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라인홀드 니이버의 말을 빌리면 "대인관계나 집단에서는 높은 도덕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비이기적인 사랑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사회나 사회 안에 있는 집단의 알력에서는 도덕적인 문제가 달라진다. 곧 비인격적인 관계까 있게 된다."(현대신학자 20인,대한기독교서회 편집회,1975,p.60)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니이버는 사회정의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 보다는 사회적 불합리에 전가하고 있습니다. 좀 쉽게 질문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가난한 자들이 게으르고 무절제하여 자신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 착취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정치인은 시민들이 민주의식이 없다고 책임을 씌우는가 하면, 시민은 정치인이 비민주적이며 독재자라고 공격합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하류층 사람들의 무지와 무능력을 탓합니다. 하류층 사람은 상류층의 사치와 외식,무관심을 원망합니다. 사회는 종교가 제 구실을 못한다고 질책하는가하면 교회는 사회가 너무나 비윤리적이라고 한탄합니다. 강자의 생리는 자신의 신분과 출신에 연연하면서,자기 정당화,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과장,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약자의 생리는 불평과 불만,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구체적인 노력이 결여되기 쉽고, 이에 따라 남에게 의존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아무도 사회정의의 문제에 관하여 책임을 지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설이나 동화 등에 나오는 사회 정의의 질문에 대하여 살펴보면 재미있는 양상을 발견하게 됩니다."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약자의 무의미한 노력에 의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기 보다는 강자의 태만과 실수에 의하여 되어졌습니다. "흥부와 놀부"에서는 두 형제 공히 문제해결을 위하여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무능력한 흥부는 맘씨 나쁜 형의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뜻밖에 제3자의 개입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심청전에서나 춘향전에서나 한결같이 제3자의 개입에 의한 해결을 보게 됩니다. 장화홍련전은 미해결, 비극으로 끝나며, 단지 압제자에 대한 막연한 경고에 그치고 맙니다. 여기서는 제3자가 개입이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에는 필시 제3자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인,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의 자각과 방향있는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또다시 교회의 사회참여, 또는 복음주의의 사회 참여 방향등의 과제를 남깁니다.

사회 정의와 관련하여 빈번히 인용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여..."(이사야 61:1)."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3)."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ㄱ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내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6-7).

위의 말씀에 따라 지금의 교회가 압박당하는 자,어려움을 겪는 자들에게 얼만큼이나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하였는지를 묻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여러가지입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둠에 잠자고 있는 민중을 깨워야 합니다. 갈곳 없이 방황하는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모르는 체 잠들어 있는 가진 자들의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새벽이 다가온 것을 알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교회는 일어나야 합니다."여기에 다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 의 구체적 표현의 하나의 소위"해방의 신학"은 남미의 특수 상황에서 나온 지역 신학 도는 상황 신학입니다. 남미의 경제적 수탈을 겪은 필름을 보았습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합니다. 지주들에게 항거하다가 옥에 갇힌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요?" "로마 카톨릭입니다."지주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요?" "로마 카톨릭입니다."지주의 주문에 따라 물리적인 힘으로 항거하는 자들을 잡아 가둔 관리에게 묻습니다."장신의 종교가 무엇이요?" "로마 카톨릭입니다."끝장면의 절규입니다. '우리는 지난 300년간을 노예와 같이 살아왔습니다. 저들은 말하기를,좀더 기다리시오 조금만 더 노력하십시오. 좋은 시절이 올 것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지난 300년간 나아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통적인 복음적 신학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종교는 이미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해방의 신학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어 압박자와 피압박자,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위의 불공평한 상황을 바로 잡는 길은 악랄한 지배층을 힘으로 몰아내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투쟁과 혁명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 혁명이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면서 무의미한 교리 논쟁을 일삼는 종래의 신학을 공격하여, 인간의 실제 문제에 접근을 시도한 점에서 해방의 신학은 공로를 세웠다고 하겠습니다. 전통적 신학의 문제는 현실적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답이 미홉한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참된 인간성의 회복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인간과의 관계성의 회복, 즉 하나님과의 원수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완전한 방향 전환(Conversion)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상태로의 향상(Betterment)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힘에 의한 혁명을 통한 해방,이것은 해방의 신학의 큰 착오입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폭력에 의한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해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개인의 회개를 통한 사단의 권세로부터의 탈출에 의하여 시발되어질 수 있습니다.

만약 해방이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그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패작이며, 차라리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는 대신 손에 창을 들고 바라바의 반란군에 가담했더라면 더 적절한 해방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사단의 협상제의(참조:마태 4:1-11)에 긍정적으로 대좌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빠르고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은 물질만을 추구하는 자에 대한, 물리적 방법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제시합니다.그러면서도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습니다.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참조;눅10:30-37). 종교나 제도보다도 우선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5-16). 배고픈 여인의 절규가 있습니다. "당신의 밥통이 사흘간 비어있다면 당신에게는 영혼이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Pieter de Jong,Evangelism and Contemporary Theology,Tidings:Grand Rapids,1967,p.4)라는 말은 집고 넘어가야 할 심각한 질문입니다.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복음화 우선의 명제를 구실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외면하는 편벽됨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사회 구원의 문제느니 제2선의 과제가 아니라 영적 구원과 함께 최일선의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그 우선 순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참조:마태6:33),또 마가 2장 4-12절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예수는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으로 영적인 구원에 우선적 관심을 가지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심으로 그의 육신적 필요를 충족케 하셨습니다.

선교와 사회정의에 대한 질문입니다. 선교사역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문제와 만나게 될 때 선교사역자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 무척이나 난감한 질문입니다. 선교지에서 부딪치게 되는 사회정의의 문제는 종교간의 갈등,부족간의 갈등, 정치적 압제, 독재,경제적 불균형, 부정과 부패등입니다. 타종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나 국가에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입국하려면 시작부터 무척 곤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선교사 아닌 다른 신분을 사용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현지인들의 눈을 속이는 일인데,어떻게 해야 할까요?부족간의 갈등, 특별히 집권 부족과 피집권 부족간에는 많은 경우 착취와 항거가 연속되는 것을 봅니다. 심하면 내전으로 발전하여 나라가 초토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들리는 쿠데타의 소식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이 경우 어느 편에 서야 합니까?이라크의 쿠르드 족 상황을 보고, 쿠르드 족을 편들어 이라크 정부에 항거하도록 도울 것입니까? 아니면 이라크의 복음화를 위하여 정부측을 두둔한 것입니까? 독재 정권에 의하여 대다수의 국민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할 때, 선교사는 독재 정부에 대하여,또 고통 당하는 국민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봉투를 첨부하지 않으면 서류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것을 거절할 것인가,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세상적인 방법과 타협할 것이지.전자의 선교사는 본부로부터 무능 선교사라는 질책을 받는 반면,후자는 기록에 남는 성공적인 선교사로 기억될 것입니다.

"선교"의 전통적 의미가 계속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선교"라는 단어가 폭넓게 사용되면서 그 진정한 의미가 점점 묽어져가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는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하여 선교가 사용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바지하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교가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교는 사회정의 그 이상을 위하여 실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신앙 고백적인 선교의 원리를 되새기려 합니다. "외방 선교에 있어서, 그들의 관심은 한분 신적인 주님이시며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었습니다. 비기독교인은 개종되어야하며,새로운 교회들이 설립되어야 하고, 그 무엇보다도,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과 그 구원의 계획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Peter Beyerhaus,Missions;Which Way? Zondervan,Grand Rapids,1971,p.17).

* 선교의 사회정의(해방신학 포함)

 1. 최근의 세계선교동향
 1) 세계교회 협의회(WCC)의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
 (1) 1980년 5월 멜버른 대회:교회 대표회의
 주제: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선교사의 역할이나 선교단체에 대한 지침
 A.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지 말라.
 B. 선교현지 교회를 지배하지 말라
 C. 자기들의 예배양식과 사상과 행정제도를 다른 문화권의 교회에 강요하지 말라
 D. 그들의 당장 시급한 필요를 무시하지 말라
 (2) 1989년 5월 센타안티오 대회
 주제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다.
 부주제:선교 - 그리스도의 방법(Mission Christ's Way)
 WCC의 선교 정책 및 노선 수정
 A. 현실세계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회귀
 B. 고난받는 자들과 동참
 C.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다.
 D. 선교 공동체들의 갱신을 위하여
 2) 복음주의 선교운동
 (1) 1980년 6ㅇㄹ 빠타야 대회 :복음주의 선교관계자들의 개인회의
 주제: 어떻게 저들이 듣게 할까?
 A. 선교이론이나 전략적 방법이 결여된 대회
 B. 정치 경제적 세계 질서 변화에 둔감
 C. 선교현장의 역사적 고통과 아픔에 대한 동참의식 결여
 (2) 1989년 7월 마닐라대회:제회 로잔세계복음화 국제회의
 주제:주님 오실 때까지
로잔위원회,세계선명회.
 A. 보편적 선교 이해 및 정책 합의
 B. 선교의 긴급성, 연합의 필요성, 희생 요구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
 C. 복음주의 선교정책에 있어서 사회정의의 과제
2. 해방신학의 발생배경

서구식 지배에서 경험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바탕으로 남미의 역사적 배경을 뿌리로 하여 출현된 제3세계 신학이다. 15세기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침략에 편승해서 지배자의 편에서 선교정책을 펴옴으로써 억눌리고 학대받는 민중들과는 소외되고 적대되는 카톨릭문화가 형성되었다. 교회가 제도적 부정의 속에 안주하며,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구 세력이 됨에 따라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의실현의 장애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에 와서는 만성적 인플레, 관료들의 부패, 군사독재와 구테타연속 등으로 정치적인 불안이 가중되었으며,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 조차 말살되었다. 더 나아가서 서구자본에 의한 경제적 종속 현상이심화되어 가고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은 구조적인 부정의 속에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남미 민중들이 이러한 사회적 부정의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대한 반기를 들고 도전한 것과 해방에 대한 의지를 표한 것"이 해방신학의 출발이라고 대표적 해방신학자요 리마지방의 사제로 사역하고 있는 페루의 구띠에레즈는 말하고 있다. 인간존엄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해방운동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현상에 대한 남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교회의 선교적 응답에서 출발되었다. 현실을 무시한 주관적 복음에 대한 역반승으로 나오게 됨.

3. 복음의 사회정의화

 1) Development(개발정책:서구의 종속이론 탈피 및 내적구조개선)
 A. 생활환경개선(Quality of Life)
 B. 경제적 자립후원(Self Support)
 C. 구조개선을 위한 지원(Social Change)-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들 스스로 사회구원 이룩토록 남미상황도 사회구원 없이 영혼구원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D. 인재양성 (Education)
 2) Humanization(인간화:대상은 인간이지 제도가 아니다).
 A. 개인존엄성 회복(Human Dignity)
 B. 개인영혼구원 (Etemal Salvation)
 C. 개인권리향상 (Human Rights)
 D. 개인책임고취(Responsible Self) - 지역사회의 책임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3) Role of Church(교회의 기능:교회중심적 선교정책)
 A. 센타로서의 교회(Centeralization)구제사업 교회와 무관하게
 B. 영적자원공급(Spiritual Sources) (미국에서) 교회와 관계 Gap이 심각함.
 C. 자립선교(Self Government)

4. 선교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의 영혼구원과 사회봉사를 요구한다.

Mission=Witness + Service;J.R.W.Stott A.Total commision of the chruch B.Long -rante plan(적어도 30년 50년 100년 미래를 보아야 인재를 얻을 수 있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의 나오게 된 동기는 기독교인의 착취를 통해서이다.

배연찬 목사 마이애미 한인장로교회